첫 기억에 대하여.
문방구를 하던 우리 집 안방에서 엄마와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TV를 보던 엄마가 갑작스레 펑펑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지 궁금해서 엄마가 보던 TV를 바라보았는데 그 화면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펑펑 우는 것 아닌가?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엄마와 TV화면 속 그 사람들처럼 울기 시작하였다. 내가 4살이었던 1983년 여름 그날, TV에서 방영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보며 엄마와 함께 울었던 에피소드는 내 첫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주 월요일. 우리 아이들 속 첫 기억 부분의 내 모습이 또 고함지르는 아빠로 점철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 주말에 와이프의 이종 사촌 여동생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와이프는 그 여동생과 그다지 친하지 않기에 몇 주 전부터 불참 의사를 밝혔고 나 역시 억지로 가지 않으려는 와이프의 결정을 존중하였다. 그런데 경북 영천에 계신 장모님이 내려오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와이프는 생각이 바뀌었다. 월요일 저녁에 나는 와이프가 장모님과 통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내려올 때 우리가 모시러 갈랬는데.”
와이프는 볼멘소리로 장모님께 대꾸하였다. 와이프는 이종 사촌 여동생 결혼식 날 내가 터미널로 모시러 갈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장모님은 그냥 영천에 계신 와이프 외삼촌 차를 타고 내려온다고 하셨나 보다. 좀 머쓱했던 와이프는 몇 주 전 내게 말한 것과 다른 말을 하였다.
“엄마. 그럼 우리 아이들 데리고 남편이랑 모두 결혼식 갈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나는 와이프의 말을 듣고 무심결에 한 마디를 뱉었다.
“에휴. 뭐 하러 또 가려 하나.”
내가 뱉은 혼잣말을 난 와이프가 듣고 있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와이프의 귀는 밝았고 감정은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장모님과의 통화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자려고 누운 내게 와이프는 대뜸 공격적인 멘트를 날렸다.
“여보는 진짜 개인주의자인 것 같아. 여보 같은 사람은 그냥 결혼 안 하고 혼자 살았어야 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해하는 내게 와이프는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밝혔다.
“아까 주방에서 한 말 다 들었어. 내가 이종 사촌 결혼식 가는 거 그렇게도 싫어?”
혼잣말이긴 했지만 난 와이프가 의도한 만큼 감정을 싣고 말을 하진 않았다. 난 억울했다.
“난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냥 여보가 하기 싫은 거 안 해도 되는데 억지로 하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에 혼잣말을 한 거야.”
와이프의 첫마디가 거슬렸지만 난 최대한 부드럽게 항변했다. 하지만 와이프는 내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냥 자기 말을 계속하였다.
“가족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 거야? 그게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 날 더러 ‘뭐 하러 가냐’고 말하면 난 기분이 좋겠어?”
몇 주 전에는 전혀 다르게 말했던 와이프였다. 약간 어이없는 마음이 들었던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가 거슬렸던 부분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 내가 말을 쉽게 뱉었네. 미안해. 그런데 여보. 그렇다고 내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날 너무 쉽게 매도하는 말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솔직히 고백하자면 와이프 말이 맞다. 와이프라는 사람이 문제라기 보단 대한민국의 이 결혼 생활 제도와 문화가 너무 내게 안 맞다. 결혼 이후 해가 거듭될수록 내가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을 와이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와이프 말대로 개인 주의자였던 난 내 나름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오히려 와이프에게 발끈하였다.
“여보. 교육학 공부했으면 귀인이론 알잖아. 어떤 사람이 의도치 않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그걸로 그 사람을 절대 변하지 않을 악인처럼 말해버리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면 누구든 심각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겠어?”
이틀이 지난 지금에서야 후회된다. 뭐 나 잘났다고 그렇게 따지고 들었을까? 그러나 이성에 기대기 위해 ‘귀인이론’을 언급했던 월요일 밤의 나는 정작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몇 초의 침묵 후 와이프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때 내게 거짓말하고 동남아 놀러 갔다 온 주제에 뭘 잘했다고 따지는 거야?”
2023년 2월. 난 와이프 몰래 직장 동료들과 방콕 여행을 다녀왔다가 와이프에게 들켰다. 난 맹세코 와이프가 싫어할만한 일(?)들은 하지 않았지만 와이프의 분노는 극대점을 찍었다. 가뜩이나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그때의 와이프에게 나의 거짓말은 엄청난 충격과 울분을 유도하였기에 지금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며칠을 내가 싹싹 빈 이후에서야 수습되었지만 그 뒤로 와이프와 크게 싸울 때 와이프는 항상 그 사건을 언급하며 날 공격하였다. 그때마다 와이프의 의도는 너무나 잘 먹혔고.
하지만 월요일 밤만큼은 그 상황에서 와이프가 날 공격하고자 나의 치부를 언급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니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날 공격하려고 굳이 우리 둘 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상기시키며 나를 깎아내려야 속이 시원해?”
내 언성이 높아지자 잠들어 있던 쌍둥이들이 깨기 시작하였다. 와이프 역시 이에 질세라 거칠게 퍼붓듯 말하였다.
“그래 시원하다! 지금도 계속 그거 떠올리면 최악이다. 이렇게라도 풀어야 될 거 아냐!”
이 정도면 진짜 싸우기 위해 내게 던지는 말이다 싶었다. 어둠 속에서 일그러지는 내 표정에 아랑곳없이 와이프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이어갔다.
“자꾸 말하지 마라 그러면 그때 내가 상처받은 거는 어떻게 보상해 줄 건데?”
와이프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보상이 되는 건데? 내가 이렇게 무릎도 꿇었잖아.”
이미 아이들은 모두 다 깨어서 울고 있었지만 난 들리지 않는 듯 내 고성을 이어갔다.
“여기 아파트 베란다에서 확 뛰어내릴까? 아니면 칼로 네 앞에서 배를 가를까?”
방 안이 떠나갈 듯 괴성을 지르자 와이프는 날 진정 시켜야겠다 생각했는지 급히 불을 켰다. 그러나 난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문에 머리를 박았다. 방바닥에도 머리를 찧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하면 그때 일이 보상되는 건데? 앞에서 콱 죽어 뿌까?”
이성을 잃고 흥분한 나에게 와이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지금 딱 아버님과 똑 같이 하는 거 알고 있나?”
어린 시절부터 내가 성인이 되어 집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난 우리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셀 수없이 지켜봤다. 부모님이 이혼 직전까지 간 횟수도 한 손만으로는 꼽을 수 없다. 부모님의 싸움은 항상 비슷한 패턴이었다.
1. 아버지의 다소 사소한 비위
2.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날 선 비판
3. 엄마의 말에 참지 못한 아버지의 분노 폭발
4. 시간의 경과로 둘 다 지침. 망각.
5. 1에서 4까지 무한 반복.
아버지의 비위가 사소한 것 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사소하지 않은 아버지 일은 나중에 벌어지는 부부싸움의 기폭제가 되곤 하였다. 월요일 밤의 우리 부부처럼.
내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3번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부부싸움 중 아버지가 극대노 단계에 이르면 세간 살림들이 남아나질 않았다. 엄마도 자주 팼다.
아버지와 엄마 모두 나이가 들면서 부부싸움을 하며 엄마를 때렸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임을 알았는지 아버지는 더 이상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진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자신을 때렸다. 자기 말에 상관없이 엄마가 자꾸 짜증을 부리면 아버지는 애꿎은 문을 주먹으로 치고 머리로 받았다. 베란다에서 떨어진다는 걸 내가 말리며 끄집어 내린 적도 있다.
성인이 되어 연애를 해 보며 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결혼은 한 적 있지만 연애는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잦은 연애 실패를 통해 자아성찰도 충분히 했다 생각했다. 나 좋다는 여자도 많았고, 2013년 이후 학생들 앞에서 화를 낸 적도 없었기에 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산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내 아들과 아내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난 아버지와 너무 많이 닮았다.
다섯 살 무렵. 우리 식구끼리 해운대에 놀러 가서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일순간 뒤에서 파도가 밀려와 내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귀여웠던지 아버지는 웃으며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며 함께 울긴 했지만 엄마에 대한 첫 기억도 아름다운 흑백 사진같이 남아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 각자에 대한 내 기억과는 달리, 부부로서의 우리 부모님에 대한 첫 기억(사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그저 싸움이다. 부모님이 부부로 지내며 행복하게 보이는 모습을 내 앞에서 보였던 순간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 부모님도 결혼 한 신혼부터 바로 세간살이가 파손될 정도의 전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러했을 것처럼 나도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와이프 앞에서 고성을 지른 적은 없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엄마의 도발에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아버지가 그렇게 까지 끝장을 볼 정도의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뇌 신경학적 근거 이외의 방법으론 설명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언급한) 내가 얼마 전 아들 앞에서 보였던 언행과 지난 월요일 밤 와이프 앞에서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까닭. 그건 아마 용서하는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내 못난 건 일단 둘째 치고)
내 앞에서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하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용서하는 것. 그래서 그 감정의 고리에서 해방되는 것. 하. 힘들다.
누군가를 용서를 하려면 일단 이해부터 해야 한다.
어린 시절과 별반 다름없는 아버지. 그리고 나. 둘 다 모두 이해하기에 어려운 대상…어휴. 더 못하겠다.
미움은 대물림되기 쉬운 감정이다.
그러면 우리 아들은 어쩌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