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슨생 Aug 12. 2024

나의 폭력일지 3

벽에 부딪친 경험

어떻게 말해도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저녁이었다. 부모님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였고 가족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밀린 숙제를 하려고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아주려 내 방 앞으로 와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 수고한다.”

  “네.”

  아버지의 말에 그냥 “네.”라고 짧게 말하고 그냥 숙제만 했다면 좋았을 것을. 난 내 의식의 흐름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

  “그런데 아버지. 있잖아요.”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

  “저도 집 밖에 따로 방을 구해서 사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6학년이 되어 옆 반에 있는 영무라는 친구와 친해졌다. 나는 영무와 부모님이 함께 사는 집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함께 하교하던 길에 영무는 자기 집을 놔두고 학교 근처의 어느 자취방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원래 자기가 살던 집을 리모델링하는 바람에 머무를 방이 없어 잠시 다른 집의 방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몰랐던 나는 겉으로만 볼 때 스스로 독립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영무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나도 그러면 어떨까라는 뉘앙스로 운을 한번 떼 본 것이다. 결코 영혼을 담아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내 질문을 들은 아버지는 돌연 표정이 굳어졌다. 아버지는 내게 되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말을 하는 건데?”

  “그냥 멋있어 보여서요. 나가서 제 방을 따로 얻어 살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버지?”

  “너. 진짜. 왜 그러는데? 뭐가 못 마땅한 거야?”

  갑작스레 기분이 나빠져 내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는 아버지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친구가 그러는 것이 괜찮아 보여 나도 한번 물어본 거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만 더 내가 하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말을 뱉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집을 나와 혼자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얘기를 부모님께 들려주었을 때 부모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짐작을 현명하게 할 수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애가 몇이나 있을까? 

  아버지에게 내가 하는 말을 ‘나 집 나가겠소.’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어린놈의 자식이 감히 대놓고 집 나가겠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하다니. 내 말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내 팔을 잡고 나를 거실로 끌고 나갔다. 

  “네가 무슨 불만이 있어서 아버지한테 그러는 거고? 응? 이 새끼가 마!”

  아버지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내 양쪽 뺨을 연타로 세게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난 울먹거리며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용서를 비는 말은 들은 채 하지 않고 아버지는 본인 뇌피셜에 기대어 내게 계속 고함을 질렀다.

  “너 혹시 아버지가 반지 장만해서 낀 거에 불만 있는 거야? 이게 그렇게 싫어?”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우리 집 형편이 잠시 괜찮아져서 집을 옮겼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아버지가 많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반지도 본인이 직접 사서 자랑스럽게 끼고 다니던 거였다. 그런데 학교에 학원까지 다니며 내 할 일이 바빴던 내 머릿속에 아버지가 무슨 반지를 꼈고 그게 얼마나 값나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건 1도 없었다. 방 얻고 싶다는 얘기를 하다 갑자기 반지라니. 울음을 터트리면서 난 억울함을 호소했다.

  “엉, 엉, 아버지. 저 절대 그건 거 아닌데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두 손을 싹싹 빌며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흥분은 가라앉질 않았다. 아버지 반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항변했지만 아버지는 계속 자기 얘기를 하며 노여움을 누그러뜨리질 못했다. 고성을 지르던 아버지는 자기 오른쪽 발을 높게 들고 일어서 있던 나의 오른쪽 뺨과 코를 향해 힘껏 킥을 날렸다. ‘쿵’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넘어지는 소리를 들은 엄마가 나와서 아버지를 안방으로 데리고 가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13살의 난, 코피가 나는 오른쪽 코를 휴지로 막고 연신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 

  ‘다시는 집 나간다는 말 비슷하게라도 안 해야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내 방 사건(또는 반지사건)’에서 아버지는 명백한 가해자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린 아들이 뭘 얼마나 알고 그런 말을 했겠나? 설사 진심으로 집을 나간다 말했다 치자. 그걸 대화로 풀지 못할 까닭이 있나? 안타깝게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의 꾸중은 대화로 끝난 적이 없다. 기절할 때까지 맞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아버지 나이를 겪다 보니 더 이상 아버지가 두렵지는 않았다. 

  대신 새로운 원망의 마음이 생겼다. 

  나 같으면 그렇게 폭력적이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나를 많이 때렸나?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공포의 기억은 어른이 되어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2012년 5월. 난 내 스트레스의 근원이 내가 담임을 맡은 우리 반 아이들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학생으로 구성된 33명의 학생 중에 내 지도를 잘 따라오는 아이는 다섯 명도 되질 않았다. 지각이나 무단결석하는 아이도 많았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적발되는 아이, 학교 밖에서 물건을 훔치다 신고를 당하는 아이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제대로 된 학습활동을 진행할 수 없었다. 2012년 이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우수한 학생들과 너무나 달랐다. 꼴통 같았던 그 학생들을 나의 행복한 학교생활을 가로막는 벽이라 생각하였다. 교무실에서 웃고 떠들다가도 우리 반 학생들 앞에서는 항상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도 종례시간에 화난 어조로 우리 반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퇴근한다고 보충수업, 야간자습 빠질 생각 절대 하지 마.”

  애들 긴장시키고 이제 나는 한숨 돌리자는 마음으로 퇴근길에 올랐는데 갑자기 교감선생님에서 전화가 왔다. 보충수업 시간인데 학생들이 너무 많이 빠졌다는 연락이었다.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또 신경 쓸 일이 생겨 짜증스러운 심정을 누그러뜨리며 핸들을 돌려 다시 학교로 향했다. 

  보충수업에 빠진 명단에 들어 있는 아이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 부탁하였다. 보충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우리 반 교실 복도에서 기다리며 15분쯤 있으니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거의 다 교실로 도착하였다. 그런데 딱 한 명, 은아는 2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은아에게 다시 전화를 해 보니 보충수업을 빠지고 놀 계획을 다 짜놓는 바람에 못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 사람대접 제대로 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튀어와. 지금 안 오면 어머니에게 당장 학교 오시라고 전화할 테니 그리 알아.”

  은아는 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너무 괘씸했다. 담임교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쩌면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얼굴이 울그락붉그락하게 씩씩거렸다. 

  그렇게 복도에서 기다리다 보니 수업 마치기 5분 전, 은아가 계단을 통해 복도로 걸어왔다.

  “야. 당장 엎드려.”

  여학생이라 교복 치마를 입고 있는 은아를 배려하는 마음 따윈 없었다. 복도를 끼고 있는 다른 교실에서 아직 수업이 진행 중이고 많은 학생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무시해 버렸다. 팔짱을 걷어 부치고 오른손에는 빗자루 몽둥이를 든 채 나는 은아에게 강압적으로 엎드려뻗치기를 명하였다. 은아는 내가 있던 우리 반 교실 뒷문 복도로 다가와 엎드렸다. 난 은아의 허벅지를 향해 몽둥이를 풀 스윙으로 세 번 내리쳤다.

  “팍. 팍. 팍.”

  “흑, 흑.”

  울고 있는 은아에게 목소리를 깔며 얘기했다.

  “이만하길 다행인 줄 알아. 당장 교실로 들어가!”    

 

  진짜 다행인 것은 나다. 그 짓거리를 하고도 고소당하지 않았다니.      

교복 치마를 입고 있던 여학생을 이렇게 때렸다. 지금이었다면 바로 SNS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을 것이다.

  아침 일찍 등교하여 7교시까지 수업을 듣고 그것도 모자라 보충수업에 (절대 자율이 아닌) 야간 자율학습까지 해야 하는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인 학생이 몇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담임교사에게 힘들다 얘기해도 씨알도 먹히질 않고 오히려 꾸중만 들으니. 내게 그 학생들이 뭘 어찌해 볼 수 없는 벽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 학생들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진짜 벽은 나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신체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 마땅하며 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 어떤 법도 가장 상위법인 헌법을 초월할 수는 없다. 학생들이 무단결석을 하거나 수업을 듣지 않으면 출석부에 그 사실을 기재할 수는 있어도 해당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하물며 정규수업 참여 여부도 개인의 자유에 맡겨야 하거늘,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야 하는 활동을 하도록 학생에게 강압했다니. 뭘 믿고 그런 위헌적 행위를 일삼았던 것일까? 대체 뭔 정신으로?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교수가 어떤 강의를 하는데 내가 듣고 있다고 가정하자. 양자역학과 관련된 매우 어려운 내용이라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런데 강의실의 대부분 학생들은 그 교수의 강의를 집중해서 잘 듣고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 나만 모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강의실 대부분 학생들이 교수의 양자역학 강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다원적 무지’에 의한 것이라 설명한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다원적 무지를 잘 알 수 있다.

  마음속으로는 어떤 규범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나 말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규범을 잘 수용하고 있다는 착각은 누구든 빠지기 쉬운 것이다. 2012년의 나는 겉으로는 학생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학생들은 무지하므로 교사가 틀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형관에 가까운 철학을 갖고 있었다. 학생을 교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한 번씩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과가 모든 과정을 보상해 준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전 학교에서부터 아무렇지 않게 학생들을 강제하는 것에 익숙해졌기에 학생들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때의 난 철저히 내 생각만 하였다. 학생들을 위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을 뿐.


  학생을 내 뜻대로 바꾸려고 한 것. 

  그게 잘 안되니 아이들이 벽이라 생각한 것.


  이 모든 것은 학교 집단에서 대다수의 교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있던 결과 지상주의를 추종하다 다원적 무지에 빠지게 된 내 어리석음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와 같은 종인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방위의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인정될 수 없다.  은아에게 결코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에게 가차 없는 매질을 한 내 행동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된 2006년 이후, 2013년까지 숱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 어떤 학생도 내가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게끔 먼저 나를 폭행하지도 않았다. 그때 나를 폭행했던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내 성질 이기지 못하여 나와 남에게 습관처럼 가학행위를 하였다. 특히 2012년,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못했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깨워 준 책.

  그래서 더 이상 아버지를 욕할 수 없다. 

  내가 받은 상처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내가 남에게 상처 준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면 아직 어른이 아니다. 뭔 일만 터지면 “아빠 때문이야. 엄마 때문이야.”라고 하는 건 아빠, 엄마 없인 못 사는 어린애나 하는 소리다. 내 아이가 낼모레면 초등학생이 되는 마당에 계속 어린애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벽이라 느꼈던 것은 타인이 아니었다. 타자와의 부딪침이라 생각된 기억은 알고 보면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타임머신이 있다면 초등학교 6학년 때로 돌아가 막무가내로 아버지의 폭행을 당했을 어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2012년으로 가서 막무가내로 은아를 때렸던 나도 꼭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어린 아들을 때린 이후 후회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그 언젠가의 내 아버지를 찾아가서 꼭 안아주고 싶다.

  그러면서 그 셋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다.

     

  “많이 힘들었죠? 같이 걸으며 바람 좀 쐬어요.”

작가의 이전글 물과 에탄올, 그리고 벤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