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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Aug 06. 2024

물과 에탄올, 그리고 벤젠

누군가와 진탕 먹고 마신 일


  나보다 한 해 늦게 우리 학과에 들어온 정은이(이하 모든 인물은 가명)를 좋아한 것은 제대 후 복학을 하게 된 가을부터였다. 함께 밥도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는 과정에서 정은이는 여전히 날 선배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는 걸 가눌 길이 없던 난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 당시 전국 방송이었던 ‘이수영의 감성시대’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짝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고백의 사연을 DJ가 읽어, 이를 고백받는 사람의 휴대폰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로 남겨주는 코너가 있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내 사연은 채택되어 방송을 탔다. 그러나 방송이 끝난 후 정은이로부터는 전화가 오질 않았다.

  그다음 날 내가 공개적으로 차이게 된 걸 알게 된 M선배는 실의에 빠진 날 위로해 주기 위해 창원에서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착한 음성사서함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코너였다. 그날은 UN의 최정원이 내 사연을 읽어줬다.

  M선배는 나와한 학번 차이가 나므로 재수를 했던 나와는 동갑이었다. 대학 입학 초기에는 어색했으나 둘 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공통점이 잘 맞아 곧 단짝이 되었고 군대 휴가도 일부러 같이 나오게 맞춰서 함께  놀곤 하였다. 제대 이후 복학했을 때에도 여전히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었기에 둘 중 누구든 좋은 일, 나쁜 일이 생기면 항상 함께 하였다. 정은이에게 까였던 그날도 난 M선배와 대학교 앞에서 술을 진탕 마셨다. 전국적으로 방송을 탄 허접한 고백 사연, 그리고 새드 엔딩. 술 먹기 딱 좋은 안주거리들이 밤을 채웠다. 우리는 둘 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고 장렬히 주사(酒死)하였다.




  

  에탄올은 탄소원자 두 개, 수소원자 여섯 개, 그리고 한 개의 산소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이다. 만약 여기서 하나의 탄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를 제거하면 인간은 먹을 수 없는 메탄올이 된다. (그리스 접두사로 메타(metha)는 한 개를, 에타(etha)는 두 개를 의미하는데 이는 탄소 원자 개수를 구별하여 특정 분자를 명명할 때 쓰인다.)

탄소가 두 개인 왼쪽 분자가 에탄올, 한 개인 오른쪽 분자는 메탄올이다.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 에탄올 분자는 산화 과정을 통해 수소가 떨어져 나가면서 아세트알데히드(학명으로는 에탄알(Ethanal))로 변한다. 술 먹은 다음날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이유가 바로 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물질 때문이다. 아세트알데히드가 한 번 더 산화되는 경우, 아세트산(학명은 에탄산(Ethanoic acid))으로 변하며 시큼한 아빠냄새를 풍기는 성질을 띠게 된다. 우리가 쓰는 식초를 에탄올에서부터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에서 식초에는 없지만 술에는 특별한 세금이 붙는다. 주세를 지불하지 않고 마시려면 술을 직접 만들 수밖에 없다.

에탄올로부터 아세트산까지 산화되는 과정. 1차 알코올이란 OH가 붙어 있는 탄소에 인접하고 있는 탄소 수가 1개라는 의미이다.

  에탄올을 만들려면 설탕을 발효시켜야 한다. 이 설탕은 주로 곡물에 함유된 것이기에 고대로부터 포도주를 비롯한 다양한 곡주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설탕(또는 포도당)을 발효시키면 에탄올과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효모가 들어가야 한다. 막걸리를 담글 때 누룩을 넣어야 하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포도당 한 분자는 효소에 의해 발효되어 에탄올 분자와 이산화탄소 분자를 각각 두 개씩 만든다.

  임용고시 재수를 하고 낙방하던 해에 설날 큰집에 가서 시골에서 담근 농주를 마신 적이 있다. 실의에 가득 찬 마음을 달래고자 사촌형이 따라주는 농주를 연신 들이켰다. 시중에 파는 막걸리 도수가 4~6도이므로 시골의 막걸리도 큰 차이 있을까 싶어 안심했는데 어느 순간 블랙아웃 현상이 왔다. 술 마시는 걸 말리러 온 우리 아버지에게 ‘형님’이라 외쳤던 나는, 아버지로부터 싸대기를 세게 맞고서야 끊겼던 필름을 다시 이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 담근 막걸리는 물을 섞지 않았을 때 15%가량의 에탄올을 함유할 수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런데 효모의 도움으로 인한 발효만으로는 12~15% 이상의 에탄올이 포함된 독주는 나올 수 없다. 에탄올의 농도가 일정 수치 이상이 되면 효모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에탄올-물 혼합용액은 별도의 증류과정을 거쳐야 위스키나 보드카 또는 안동소주 같은 술로 변신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원리일까?

  수입에 의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원유는 각 지역에 있는 정유 공장으로 보내진다. 정유공장에서는 분별증류 과정을 통해 원유가 휘발유, 경유, 등유 같은 기름들로 분리될 수 있는데 이는 액체 혼합물을 냄비에 넣고 끓이면 끓는점이 낮은 물질부터 먼저 끓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에탄올과 물이 혼합된 용액 역시 원유의 분별증류 같은 과정을 거쳐야 에탄올과 물이 따로 분리될 수 있다.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해 물질을 분류하는 분별증류 장치

  그런데 에탄올-물 용액으로 아무리 증류과정을 반복한다 해도 95% 이상의 진한 에탄올을 얻을 수는 없다. 이 혼합 용액을 가열하면 물보다 끓는점이 낮은 에탄올부터 끓어 증기가 되고, 이는 증류장치 끝단에서 액체방울로 변하는데 여기엔 최소한 5% 정도의 물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얻은 순도 95%의 에탄올을 다시 증류한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이는 물과 에탄올 사이의 특별한 상호작용 때문인데, 아무리 끓여도 성분 함량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화학에서는 에탄올-물 혼합 용액을 불변 끓음 혼합물(azeotrope)이라고 한다.

그래프 x축 어느 지점에서 끓여도 증류되는 용액의 조성이 b지점으로 수렴된다는 의미이다.(임용공부하며 보던 책이라 지저분…)


  하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물과 에탄올도 그들 사이에 벤젠(Benzene)이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벤젠은 물과 섞이면 불변 끓은 혼합물 성질을 보이지만 에탄올과는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이 성질을 이용하여 물-에탄올 혼합용액에 벤젠을 소량 첨가하고 분별증류 작업을 하면 100% 농도의 순수한 에탄올을 증류해 낼 수 있다.


  나와 M선배 사이의 관계도 물과 에탄올 사이처럼 매우 특별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든, 실험실에서 과제를 하든, 술집에서 한 잔 하든 언제나 우린 함께 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편입을 하여 우리 학년으로 여학생 H가 들어온 이후 나와  M선배 사이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화학 실험에서 나의 팀원이었던 H.

  입학 이후 항상 나와 함께 했던 M선배.

  그리고 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딱히 H를 그리 좋아해서 절절 매고 한 것은 아니나, 그 당시엔 구구절절한 삼각관계 레퍼토리가 좀 형성되었다. 진부한 내용이라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대학교 4학년 이후로 M선배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일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임용 첫해만에 바로 붙은 M선배와 H 사이의 연인 관계도 길게 가진 못하였다.


  같은 학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M선배를 본 것이 2010년쯤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교육청 연수에서 우연히 M선배를 보았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연수에 참석하여 주최자로부터 배부받은 종이에 주민번호를 쓰는 걸 흠칫 보던 M선배는 겸연쩍게 한마디 했다.

  “이야. 오늘 너 생일이네. 축하한다.”

  아예 몰랐다는 소리다. 카톡에도 뜨지 않았나 보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면 며칠 전부터 ‘어이. 한군. 생축 어디서 할 건데?’하며 너스레를 떨었을 사람인데.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나도 그의 생일을 아직 기억은 하지만 축하해 준 적이 10년은 넘었으니 달리 할 말은 없다.


  M선배와 멀어지기 시작한 대학교 3학년, 그때는 편입생 H를 물과 에탄올 같았던 나와 M선배 사이의 벤젠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 사람들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게 된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벤젠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가 느꼈던 서운함도 어쩌면 잘 나가는 동료들에게 가졌던 지질한 시기 질투 아니었을까?

  나랑 동갑이었던 M선배가 내 후배였다면 나는 그에게 첫 만남에서부터 ‘선배’라는 칭호는 빼라고 말했을 것이다. 함께 연수에 참여한 올해 내 생일에도 그는 내가 붙이는 ‘선배’ 칭호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길게 우정을 나눌 사이가 아니었던 M선배와 나는 애초에 물과 기름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M선배와 함께 하는 자리를 가지면 에탄올 흡수에만 집중해도 될 것 같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진지한 교감을 나눌 필요는 없다.

  에너지는 일정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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