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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렌지 Apr 21. 2024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을게.

등원전쟁 2

    

아이들이 등원버스를 놓치면 어떡하지.. 시간 안에 준비를 못하는 게 습관이 되면 어떡하지..     

이렇게 자꾸 소리 지르며 화내다가 아이들에게 나쁜 기억만 심어주는 게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엄마 나 좀 기다려주세요! 엄마 다했어요. 기다려주세요! 기다려주세요!”


아이의 기다려 주세요를 여러 번 들었던 어느 날 나는 왜 아이를 기다려주는 게 잘 안될까 생각해 봤다. 그러다 문득 어릴 때 부모님께 기다려달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시절엔 아빠의 말이 곧 법이고 아빠의 기분이 집안 분위기를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컸다.     


나의 친가는 강원도 평창이다. 경남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명절 때마다 차를 6시간 이상 타고 가야 했다. 특히 귀성길에는 막히는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어떤 날은 새벽 2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짐을 챙겨서 출발한 적도 있다.

초등학생 때는 새벽마다 일어나서 준비하고 가는 게여간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준비하지 않으면 아빠는 인상이 굳어지고 언성을 높이셨다.

빨리 준비를 하고 나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나갈 채비를 한 적이 많았다.      


나름대로 최대한 빠르게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때도 아빠는 한껏 굳어진 얼굴로 이것저것 챙겨나갈 짐들을 챙기고 빨리 준비하지 않는다며 투덜대셨다. 어린 나는 그런 아빠가 무서우면서도 미웠다. 

빠르게 준비했는데도 칭찬받기는커녕 무서운 분위기에 긴장을 하며 떠나야 했으니 억울하기도 했다.

화도 났다. 그런데도 한 번도 그런 내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아마도 제일 억울했으리라.     


“기다려주세요! “


아이들이 내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할 때 알게 되었다. 나도 어릴 때 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싶었다는 걸.


어린 시절 나의 마음이 떠올랐다. 무겁고도 긴장감이 흐르던 분위기에서 그 말을 하면 화를 낼 것 같으니까.

그럼 너무 무서우니까 그 말을 못 하고 눈치 보며 준비하는 내가 보였다.     


그때의 긴장감이 습관으로 굳어졌을까.. 등원준비뿐 아니라 가족이 외출준비를 하면 어김없이 예민함으로 똘똘 뭉쳐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머리로는 여유롭게 준비하고 싶어 이것저것 동선을 계획하고 미리 짐들을 챙겨놔도 여전히 가벼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외출을 해본 적이 없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거나 명절을 보내러 가게 되면 그 예민함이 나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절정을 달린다. 많은 짐을 싸야 하는 것부터 짜증으로 다가와서 준비물을 하나씩 빠뜨리기도 할라치면 남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쏘아붙인다.

아이들이 로봇처럼 척척 맞추어 움직이길 바라는 것처럼 내 예상에 빗나가는 행동을 할 때면 그야말로 폭군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바쁘고 조급한데 느긋하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남편의 모습과 편안한 표정을 보면 왠지 모르게 억울하기까지 하다.

나만 바쁘게 준비하는 것 같은 조급함이 드는 게 싫다.


아이들이 어른처럼 시간을 쪼개서 계획하고 움직이는 게 안 되는 건 당연하다. 내가 아이들에게 시간 보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내 말에 척척 움직여주는 걸 기대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을 안다.

그래도 아이들이 하나씩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배워가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조련사가 아닌 조력자가 되어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이들의 자발성과 나의 시간관념에 대한 조율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시간을 보는 법을 알려주며 시간에 맞추어해야 된다는 게 중요하다고

일러주었다.

이것부터 내가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훈련시켜 주면 효과적으로 등원준비가 될 것 같았다.      


등원준비시간을 더 이상 화내는 나의 모습으로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불안을 좀 더 컨트롤하고, 아이들의 수준에서 기다려주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 필요했다.

숫자가 눈에 잘 띄는 전자시계를 가져와 거실 중앙에 테이블 위에 두고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시간에는 밥을 먹고, 이 시간이 되면 옷을 입을 거야. 그리고 이 시간이 되면 문밖을 나가야 되는 거야.”      

한 번에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배웠다. 첫째가 시계 보는 법을 먼저 익히더니 익숙하지 못한 둘째의 준비를 도와주기도 했다. 차근차근하다가 마지막 신발 신는 곳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시간 맞추어 나가는 게 실패할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졌고 며칠이 지나자 익숙해진 행동들로 여유롭게 등원준비를 하기도 했다.      

“우리 힘을 합해서 해보자. 할 수 있어”      

시간에 맞춰서 준비를 잘하고 현관을 나가면 보상을 준다고 했더니 첫째와 둘째가 의기투합해서 미션 수행하듯이 등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화를 내지 않고도 즐겁게 아이들과 등원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이 달라지니 아이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발을 신는 아이의 얼굴이 즐거운 소풍날 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같은 등원준비시간인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집안에 느껴졌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엄마로서 대단한 일을 해낸 것만 같은 마음에 감격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Unsplash의 note-thanun

 아이들이 기분 좋게 등원하고 온 날, 전쟁 같았던 등원준비시간이 너무도 평화롭고 여유 있었던 그날, 마음속으로 너무도 뿌듯하고 보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내가, 이제 아이들을 믿고 다그치지 않고 해내는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스스로를 기특하게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간관념이 나의 불안이었다는 것과 그것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기다려주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뿌듯한 느낌이라는 걸.     


어느 날 현관문을 나서면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차근차근 준비를 잘해줘서 고마워.”

나를 올려다보며 첫째가 말했다.

“엄마,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마음이 뭉클했다. 힘들었던 일상의 순간이 행복한 순간으로 마법처럼 변한 것 같았다.  


예전보다 좀 더 아이를 기다려줄 수 있게 된 나를 발견할 때마다 기쁨이 밀려온다.

자란다는 게 성장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까.

끊임없이 배우고 발전하려고 노력했던 학창 시절의 성장과는 달랐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자랄 수 있다는 희망과 아이와 함께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싹텄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조금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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