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육공 Apr 23. 2024

서랍 속 도깨비

  작은 방 한 켠 가장 아래 서랍에는 도깨비가 산다. 좀처럼 꺼내지 않는 추억을 먹고 자라났다. 그가 먹은 추억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서랍의 주인이 가지런하지 못한 탓이다. 어린 시절의 사진, 그 당시 예뻐보여 구매한 스티커와 엽서,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 학교에 새로 갈 때마다 다시 찍은 증명사진, 좋아하던 영화의 포스터, 문방구에서 산 녹슨 반지 같은 산발적인 것들. 아주 오래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낡았지만 소중한 추억이 그의 식사이자 보금자리이다. 도깨비는 자신이 언제 태어난 건지도 잘 모른다. 처음 태어났을 때엔 그 작은 서랍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서랍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도깨비는 서랍 주인의 삶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서랍의 주인을 사랑하였다. 모든 편지에는 애정 어린 말들이 적혀있었다. 사진 속의 주인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어린 주인도, 어른이 된 주인도 항상 인상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을 누렸다. 녹슨 반지에 박힌 큐빅은 여전히 반짝였고, 아기자기한 스티커와 엽서가 주인의 사랑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4장의 입학사진과 졸업사진에는 화려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도깨비는 그런 존재가 자신을 구성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하늘이 열렸다. 서랍의 주인은 도깨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서랍 안의 모든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도깨비가 처음으로 목격한 진짜, 서랍의 주인이었다. 도깨비가 알던 것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고, 매우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랍 안의 추억 위로 비가 내렸다. 도깨비가 처음으로 맞아보는 비였다. 글자가 번질까 사진이 바랠까 금방 닦인 눈물이었지만, 도깨비에게는 홍수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 뒤로도 가끔씩 하늘이 열리는 날이면 적든 많든 비가 내렸다. 서랍의 주인은 손끝으로 추억을 더듬어 위로를 찾았다. 도깨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깨비는 다시는 주인이 서랍을 열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랐다.


너는 잊고 지낼 테지만, 작은 서랍 속 가장 빛났던 너를 내가 알아, 네게 건네어진 반짝이는 단어들을, 가장 멋졌던 순간들을.


  들리지 않을 말로 끝없이 위로했다.


  다시금 하늘이 열렸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추억이 잔뜩 밀려들어왔다.


  안녕, 난 서랍 도깨비. 가끔은 서랍 위로 비가 쏟아주기도, 때로는 반짝이는 것들이 쏟아지기도 한다는 걸 알았어. 네가 나를 찾는다면 눈물 닦아줄 추억 안에서 있는 힘껏 너를 안을게. 낡고 지친 마음을 기대도 좋아. 내 작은 손끝에 사랑을 담아 너를 위로할게.


  당신이 모르는 서랍 도깨비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러 번 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