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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뿔 Sep 10. 2022

자이가르닉효과

'북한에 이는 속독의 열풍' 기사를 접하고

우연히 TV에서 북한에 속독법이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뉴스에 나온 한 학생은 1초에 10페이지 가량을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책장을 넘기는 속도로 읽었고 리포터가 책에 나온 숫자를 묻자 술술 답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읽을 수 있냐는 질문에 읽은 내용을 영상으로 저장한다고도 했습니다.

머리속에 영상으로 텍스트를 저장할 수 있다면 짧은 시간안에 많은 양의 정보를 

엄청나게 정확한 방법으로 저장하고 다시 꺼내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정보화시대에 정보를 더 빨리 더 많이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속독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텍스트를 영상으로 저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읽고 저장하고 출력하는 두뇌는 이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정보사회의 본질을 정확히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수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읽고 걸러내는 과정에서 빠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정보화시대의 전문가들은 정보를 많이 읽고 많이 저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 두가지 단서를 보고도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대처하는 사람들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세세한 정보는 보조기억장치에 담아두고 필요하면 누구나 꺼내 쓸 수 있도록 매뉴얼을 간략히 체계화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겁니다.



또 책을 빨리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디스켓보다 못합니다.

우리가 메모하는 이유는 머리에서 그 내용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핸드폰이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기능을 선보이자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능력을 빠르게 잃었습니다. 노래방이 번성하면서 노래가사를 외우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우리의 두뇌는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언제든지 재조직될 수 있는 오픈 아키텍쳐입니다.

단순히 빨리 읽고 많이 저장하고 정확히 출력하는 것은 이제 보조기억장치로 충분합니다.


이미 19세기 말에 니체는 말했습니다.


그저 읽은 내용을 외우고 다시 말하는 것은 낙타가 힘들게 책을 지고 사막을 건너서 그 책을 전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이죠.......

예나 지금이나 책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새로이 함에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로 속독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많은 정보가 있을 때 빠르게 읽는 사람이 느리게 읽는 사람보다도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속독이 장려되고 속독 콘테스트까지 열리면서 이른바 속독열풍이 분다는 것에서 

참다운 독서의 본질이 변질되어 다만 읽기 능력테스트로 전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렇게 영상을 스캔하듯이 읽은 내용이 과연 우리의 기억에 얼마나 남아있을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1927년,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자가 

친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의 커피하우스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거기 앉아서 음료수를 몇 잔씩 시켰지만 웨이터는 주문을 전혀 받아적지 않았다. 

자이가르닉은 이 사실이 흥미로웠다. 

계산을 끝낸 뒤에 일행이 모두 돌아가자 그녀는 다시 커피하우스로 돌아왔다. 

웨이터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웨이터가 자신들의 주문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해석하는 한 방법은 뇌가 열리고 닫히는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계산이 끝나자 마자 웨이터는 그 파일을 닫고 망각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뒷날 ‘자이가르닉효과’로 로 알려진 것이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그 효과를 경험해본 사람들에게 마치 우리가 기억을 할 때 기억의 목적을 한시적인 꼬리표로 달아놓은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목적으로 기억을 했다면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경우 관련된 기억은 소멸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벼락공부가 정말 의미없다는 것이 밤샘을 해가며 외우고 익혀보아야 시험을 보고 그 답을 바로 썼다는 것이 인지되는 순간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뇌가 닫힌 거죠)


독서의 형태가 누군가에게 제대로 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형태로 된다면 그 기억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순간 날아가버리는 휘발성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속독은 편리하고 도움이 되는 기능입니다.

빨리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빨리 정보를 해독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속독이 먹히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의미수준이거나 한 단계 낮은 수준의 텍스트일때입니다.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관념이나 심층적으로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텍스트는 

속독으로 단련된 두뇌에게는 잘 읽히지 않는 책이 될 것입니다.


한번 읽고 두번 읽고 이해될 때까지 계속해서 읽을 수 있다면 물론 가능합니다만

이렇게 되면 이미 속독의 의미는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재미있을 때 가능하지 이해되지도 않는 책을 그저 빨리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몇번 씩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속독학원이 인기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속독방법이 제시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미 어릴 적부터 속독과 남독의 폐해를 경험했던 것같습니다.

아무 책이나 읽었고 그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안다는 것을 뿌듯하게 여겼더랬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늘어났다고 해서 현명해지거나 유용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정보화사회에 대한 대처방법이 우려스럽고 한편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도 보아집니다.

진정한 독서는 결국 인문학적인 발견으로 이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인문학적 발견은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자각 및 비판적 사고의 맹아가 되어버릴 소지도 있으므로..... 북한에서 인문학이란 과연 김일성유일체제와 사회주의담론이라는 사고의 철창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까지 생각이 뻗치게 됩니다. 

제대로 된 독서는 북한과 같은 폐쇄주의 집단에게는 체제붕괴의 핵폭탄과 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뭐 그 반대로 자신들 체제의 도그마를 강화하는데 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지 편리함이나 빠르다는 이유로 속독이 권장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속독의 효용이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한 탐색이나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고 또 읽는 재독의 도구로나 쓰여졌으면 싶어요..


제대로된 글읽기는 작가와 독자의 호흡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속도로 읽어 질 것입니다.

느리게 씹어먹듯이 읽다가 어떤 때 기세좋게 몇 페이지를 달리다가 잠시 덮어두고

인상적인 내용을 메모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하기도 하고

목차를 다시 훑어본다던가 후기나 작가연보를 보면서 관련지식을 보충하고

애매한 개념들을 사전이나 인터넷검색으로 분명히 하면서 다시금 돌아오는 그런 독서가 필요합니다.

그럴려면 내가 익히 아는 내용과 새로운 내용이 적절히 배합된 책을 잘 고르는 것도 선결과제가 아닐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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