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안에서 작동하는 읽기의 도구

2장 단서 추출

by 무뿔

푸코는 앞서의 분류법에 대해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이라고 말하며 이 경이로운 분류에서 도대체 무엇을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어떤 불가능성이 문제일까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 질문은 동물 분류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사고 방식, 즉 우리가 세계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기준에 대한 질문이었다.

푸코는 그 웃음, 그 어색함, 그 멈춤을 단서로 삼았다.

그리고 그 단서를 끝까지 붙잡은 결과가 『말과 사물』이다.


다음에 인용할 문장은

『말과 사물』 1장 시녀들을 읽으며

내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게 되었던 대목이다.


그의 어두운 몸통과 밝은 얼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이다.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캔버스에서 벗어나면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만,

이윽고 오른쪽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될 때에는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그리고 있는 캔버스의 정면에 놓일 것이다.

그림은 한 순간

우리의 시야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곧바로 자신의 눈에 온전히 가시적이게 될 그러한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치 화가는 자신이 재현되어있는 그림에서 보일 수 없고 이와 동시에 자신이 무언가를 재현하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림을 볼 수 없는 듯하다. 그는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시성의 문턱에 군림한다.

말과 사물 p26


처음에는 두가지 가시성의 문턱이라는 말에 걸렸다.

어떤 가시성이 두가지가 있는지 찾으려고 다시 읽어보았지만 확실한 것이 없었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속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전면을 향해 보고 그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가 왜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볼 수가 없지 지금 보고있는데 라고 생각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자리를 바꾸면서 생각할 수록 불확실해졌다.

내판단을 믿지 못하고 나는 이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림을 보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화가와 화가가 그린 그림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 생각이 유지된다면 내가 인용한 글을 수용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어서다.

그냥 '푸코는 뭘 말하려는 거야?' 라는 생각만 나는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이해의 한계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보고 있다고 믿어왔는지에 대한 첫 번째 균열이었다.


푸코는 계속해서 말했다.

거울을 이야기하면서 비가시성의 두 형태를 꺼냈다.

나는 또 멈췄다.

아니 왜 이번에는 비가시성인가?

나는 그림의 설명을 원했던 것같다.

푸코는 그림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시선들을 지속적으로 분석했다.

심지어는 독자인 나의 시선까지 자신의 사유에 포함시켰다.

나는 이런 글을 읽어본 경험이 없었다.


...다시 말해 고유명사는 말하는 공간에서 바라보는 공간으로 슬그머니 넘어가게 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이 두공간이 마치 상호 부합하듯 서로 겹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언어와 가시적인 것의 관계를 열려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싶다면 이 양자의 양립불가능성을 장애물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 이 양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려면 고유명사를 지우고 무한한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회화작품이 조금씩 밝혀지게 되는 것은 아마도 너무나 폭넓기 때문에 언제나 면밀하고 반복적인 익명의 잿빛언어를 매개로 해서 일것이다. 말과 사물 p35


나는 독자로서 이 '무한한 작업'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단지 푸코가 이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내용을 알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푸코는 심술궂게도 그 내용을 바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방식은 자신의 사유 과정을 따라서 사유하며 읽게 만드는 것이다.

푸코에게 읽기란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유의 근육을 재배치하는 훈련이다.

그는 왜 친절한 해설 대신 '익명의 잿빛 언어'를 선택했을까?

고유명사라는 편리한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우리의 사유는 멈추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의 초상화다"라고 명명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안에 얽힌 시선의 권력과 가시성의 문턱을 고민하지 않는다.

이름이 사유를 대신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푸코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자리를 흔들고, 이름을 지우게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보는 방식'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결국 우리가 경험한 그 어지러운 공백은 푸코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이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라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진 텍스트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걸려있었다.


계기는 언어와 공간의 불일치를 자각했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말과 공간의 관계 즉 지시어인 말과 대상인 공간을 나는 자동적으로 일치시키며 읽어왔고

그 상태에서는 의문이나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거다.

이름이 명명되어있을 때 우리는 이름과 그 대상을 통으로 인식한다.

- 왜 저 사물이 그 이름이어야 하는가를 굳이 묻지 않는다.

그가 고유명사의 이름표를 떼고 보기를 권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름이 붙어있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결코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시녀들이라는 그림에서 이름표를 떼어냈을 때 그림은 낯선 공간이 되고

내 시선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사이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 방황속에서 나는 나의 상태를 자각했고 멈춤은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책을 읽어내는 힘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