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21세기 초. 인류는 유전학적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인 '레플리칸트'를 만들어낸다. 레플리칸트는 인간과 동등한 지적 능력에 인간을 앞서는 신체 능력을 가졌으나 격리된 채 전투원이나 우주 개발, 또는 섹스 인형과 같이 인류의 노예로서만 사용되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은 단점이 있는데, 수명이 4년으로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레플리칸트는 인류와 동일한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식민지 행성에서 레플리칸트 전투팀이 폭동을 일으킨 뒤엔 레플리칸트가 지구에서 거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된다.
지구에 불법적으로 들어온 레플리칸트를 찾아내고 처형하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 불리는 특수 경찰 팀이 만들어지고, 이들은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해 인간과 레플리칸트를 구별해 내고 레플리칸트를 사살하는데, 이 사살을 처형이라고 하지 않고 폐기(retirement)라고 부른다. 즉 레플리칸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2019년 11월, 한때는 블레이드 러너였지만 이제는 은퇴한 인물인 릭 데커드가 다시 경찰인 브라이언트 반장에게 호출을 받는다. 십수 명을 학살하고 LA 주변으로 잠입한 신형 레플리칸트, '넥서스(Nexus) 6'들을 찾아내 제거하라는 게 그 이유. 레플리칸트 여섯이 지구에 잠입했지만 이들 중 둘이 타이렐 사에 잠입하다 제거되었고 넷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데커드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결국 레플리칸트들의 추적에 나선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딱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바로 인간과 리플리컨트(replicant), 즉 다시 말해 복제 인간이다. 1982년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인간들의 상상 속 2019년도의 모습을 재현한 영화이다. 인간과 복제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상.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존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 조금 다르다. 인간과 달리 2019년 세상의 복제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재산이자 생산품일 뿐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는 극한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창조자인 타이렐 박사도 그들의 길지 않은 수명에 대하여 외면할 만큼 그들은 “인간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한다.
여기서 의문점이 한 가지 들었다. 과연 이 영화에서 명시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이 포인트에서 가프가 한 대사가 떠올랐다.
“하긴 누구는 영원히 살겠나?”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인간 또한 영원히 살지 못한다. 단순히 복제 인간보다 몇십 년을 더 살 뿐 결론 죽음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복제 인간들이 인간다움이란 = ’더 오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이가 그렇게 목숨의 연장에 끝없는 욕망을 표출했던 것이다. 또한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인간들의 감시 아래, 무기로 때로는 유흥적 요소로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 삶을 개척하여 나가는 모습은 절대 볼 수가 없다. 그들은 마음대로 사랑을 할 수도 멀리 떠날 수도 없다. 말 그래도 구속이 일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이렇게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오히려 그 적은 복제인간들의 숨겨진 야망과 본성을 오히려 더 일깨우는 각성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들의 인간다움에 대한 욕망이 이 큰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인간다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냥 살아간다. 나도 지금 당장 내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다움을 무시한 채 누리지 못하는 부분만 바라보면서 권리를 달라고 억지로 고집 피우고 있는 모습이 있지는 않았을까 반성하게 되는 영화였다.
2019년, 영화 속 이곳은 복제 인간 즉 기술이 무기인 곳이다. 경찰들은 총을 소지하고 자신이 범인을 단속하는 와중에 총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사용이 자유로운 공간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개념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는 복제 인간을 단속하는 경찰이다. 단순히 복제 인간만을 단속하고 살해하는 것이 아닌 “감정”을 가진 복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데커드의 임무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들에게 차가워야 할 데커드는 또 다른 리플리컨트인 레이첼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첫 번째 그가 살해한 복제 인간을 통해 그는 레이첼을 자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 내내 나는 데커드가 그들을 내가 왜 살해해야 하는지 모른 체 단순히 임무에 충실하는 경찰관, 그 모습이 다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복제 인간을 죽인 뒤, 그의 모습은 조금 달라졌다. 레이첼과 더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단순히 복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오래 사는 것이었는지 의문점을 가지고 이 사건에 접근한다. blade runner를 네이버 사전에 쳐보니 blade는 무기 runner는 밀수업자라는 뜻이 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뜻은 겉으로는 그 무기 즉 복제 인간을 상품으로만 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오히려 뒤에서 숨겨주는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마치 레이첼을 죽이지 않고 뒤에서 지켜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미래를 상상하여 영상에 재현하는 다른 영화들은 다 진보적이고 훨씬 더 발전된 사회를 그리곤 한다. 하지만 여기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다르다. 언뜻 보면 훨씬 더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회 같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더 퇴폐하고 발전되지 못한 장소들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점이 다른 영화들과 달라서 인상 깊었다. 사진을 보고 분석하는 장면에서는 그 당시에는 굉장히 획기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데커드가 조사를 나간 뒷골목에서는 지금보다 더 노후해진 길거리의 환경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는 감독이 과연 미래라고 해서 환경이 더 깔끔해지고 더 발전된 사회를 우리가 마주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점을 던져주는 것 같아서 신선했다.
@ 원문 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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