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이 어려워지는 이유

— 모더니즘 이미지로 가기전에

by kate

모더니즘 이미지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질문을
정리해보려한다.


왜 어떤 순간부터
이미지는 흐려지고,
대상은 분해되며,
결국에는
‘이게 무엇을 그린 것인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을까.


한때 사람들은

세계를 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는 거기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면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이미지는
이 믿음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원근법은 정확했고,
비례는 계산되었으며,
인체는 해부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이미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계는 질서를 가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로 오면서
이 믿음에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진이 등장한다.
순간을 정확하게 붙잡는 기술 앞에서
회화는 질문을 받는다.
“그럼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프로이드는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고.


전쟁과 산업화는
세계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로 보여준다.


세계가 바꼈다는 말도 맞고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에 가까웠다.


이때 질문이 바뀐다.

이전까지의 질문이
“무엇이 진실인가”였다면,


이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는 대상이 그게 맞아?"

"맞다면?

알고있던 진리라는 것들이

마구 흔들리는 세상과 마주보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AI를 보면서 급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멀미가나는 느낌과 같지 않았을까?

유투브에서 마구 쏟아지는 정보들을 보며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가 없는 지금 이 상황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튼

그당시 사람들도

대상이 바뀌거나 흐려진 것이 아니라,
대상에 닿고 있다고 믿어온 방식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구조’라는 말이
천천히 등장한다.


구조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의미를 갖게 되는
보이지 않는 틀이다.


언어,
시점,
문화,
사고의 습관.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아마 그런사유들이

이미지에서
불편한 감각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는
이 불편함의 첫 반응이었다.

대상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빛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였다.
이미지는 말한다.
“나는 이렇게 보았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충분하지 않게 된다.

보이는 조건을 바꿔도
대상은 여전히
잡히지 않는다.

그때
더 깊은 질문이 등장한다.


혹시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보는 방식’ 자체가
문제는 아닐까.


이 질문이
모더니즘의 출발점이다.


모더니즘의 이미지는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제 이미지는
대상을 더 정확하게 그리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대상을 이해한다고 믿는
방식 자체를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대상은 그 구조안에서 해체되고,
시점은 분해되며,
이야기는 사라지고

구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변화는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당연하다고 믿어온

보이지 않는 신은 위대했고

점차 보이는 대상을

진리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려 했는데.

그것마저
의심하기 시작한거다.

대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진실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실에
곧바로 닿고 있다고 믿었던 확신이
이제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질문 이후,
이미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여기까지가

왜 모더니즘에서

말이 사라지는지를

조금이라고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을 가장 급진적으로 받아들인 이미지들,
대상이 사라지는

즉 이미지가 말을 줄이고

보이지 않는 구조로 숨어버린듯한

이미지 모더니즘을 보려한다.

작가의 이전글이미지의 생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