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이미지는 해체되기 시작했는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미지는
명확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는 질서 있게 만들어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미지는 그 질서를 정확히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그림은 하나의 시점을 가지고정확한 비례와 원근을 사용하며
“세상은 이렇게 생겼다”고 말한다
인상주의는 이 확신을 흔들었다.
세계는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았고,
빛은 순간마다 달라졌으며,
같은 대상도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렇게 보인다는 감각을 붙잡았다.
확신은 사라졌지만, 눈은 여전히 믿을 수 있는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 인상주의 화가들은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본 순간을 그리자.”
그래서 이미지는 정확한 형태보다
빛과 색, 순간의 인상을 담는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는 대상’은 중심에 있다.
폴 세잔 Paul Cézanne 1839 - 1906. <사과>
폴세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대상을 정말 한 번에,
한 시점으로 보고 있을까?”
세잔의 사과를 보면
테이블은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기울어 있고
사과의 몸통은 옆에서 본 것처럼 둥글며
접시는 정면에 가까운 각도로 놓여 있다
그는
사과를 한 번에, 한 자리에 서서 본 것이 아니라
보는 동안 계속 위치를 바꾸며 관찰한 결과를 한 화면에 남겼다.
그래서 그림 안에 이런 일이 생긴다
사과 하나 안에도
위에서 본 느낌옆에서 본 느낌이 겹쳐서 존재하고
테이블과 사과가
같은 공간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림은 말한다
“이 장면은 한 순간이 아니다.”
세잔의 결정적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 우리는 그냥 ‘보는’ 것일까?”
“아니면,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풀면,
눈은 그냥 색과 선만 받아들이고
그걸 사과, 사람, 테이블이라고 정리하는 건
눈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라고 말한다.
"저기에 뭐가 있어?” 라는 질문에서
“나는 저걸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지?” 라는 질문으로
옮겨간다는 이야기다.
폴 세잔의 사과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거다
“그 사과모양이 이상한게 아니고
네가 보는 방식이 하나로 고정돼 있다고 믿은 건 아니야?”
즉,
우리는 세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보는 게 아니라,
보는 방식을 만들어서 보는게 아닌가?
그래서 세잔의 그림은
사과 이야기가 아니라
‘보는 사람’ 이야기다
이때부터
이미지는 사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스스로 정하란
이야기 인가?
이미지가 해체되고 대상이 없어지는
그림을 대하는것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만나는것과
같은 느낌이다.
푸는 방식을 모르면
풀수 없을거 같은.
이 그림을 어떻게 봐야하지
하는 문제를
이때부터 화가들은
관객에게 넘긴다.
세계는 그대로 주어지고,
보는 행위는 중립적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깨지고 있었다.
이미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게 만드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이미지는 처음으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왜 이런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왜 대상을 바로 그리는것이
어려웠을까?
세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과학은 세계를 쪼개서 설명하기 시작했고
사회는 더 복잡해졌으며
전쟁으로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려 했고
하나의 시점으로 세상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이미지는 더 이상
“이게 세상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미지는
확정된 답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피카소는
세잔의 질문을 더 밀어붙인다.
“하나의 대상이
여러 시점에서 보인다면,
굳이 하나의 형태로 남아야 할까?”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얼굴이 조각나고
앞과 옆이 동시에 보이며
대상이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때 이미지는
대상을 더욱 ‘해체’한다.
세잔과 피카소 이후
이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게 무엇이다”
“이렇게 보라”
대신 이렇게 남아 있다.
여러 시점
불안정한 구조
열려 있는 해석
이제 이미지는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보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장치가 된다.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멈추라!
판단하지 마라!
말하지마라!
이해하지 마라!
레비나스가 했던말이 생각난다.
이해도 폭력이다.
왜?
이해하려 하는것도
나의 구조안에 넣으려는 거니까.
그냥 그대로
멈춰라.
몇일전
일론머스크의 인터뷰는
뒷머리 한대 맞은것같은 강도로 다가오고
유투브에는 사람들이 보고싶은거 자극적인것만
잘라서 숏츠로 난립하고
이란은
보고 있는 자체가 고통이고.
딱 이순간
세잔, 피카소를 보면서
다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한다.
답이 정해진것이 아니니.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작품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어떻게 보게 만드는가를 처음 시도해서 였다고 한다.
세잔이 던진 질문은
보는 방식을 구조로 드러내는 입체주의
대상 없이 보는 조건만 남는 추상미술로 간다
점점 난해해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이제는 함수에서 미분 적분으로
가는 느낌이다.
풀어야 하나? 포기 해야 하나?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이미지가 내린 더 급진적인 선택,
대상을 비워내고
구조만 남긴 이미지를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