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그들이 남긴 향기

by 안순나



창가로 부는 바람이 조용히 방 안을 스치면, 나는 언제나 그 시절을 떠올린다. 한 겹 한 겹 겹쳐진 기억의 먼지 위로 햇살이 내려앉듯, 시절인연의 잔향이 내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향기다. 카페의 커피 향처럼 짙고, 오래된 책 속의 냄새처럼 잔잔하다. 나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 지금 내 앞에서 다시 숨 쉬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길 위에서 작은 별을 하나씩 붙들고 산다. 그 별은 친구이기도, 스쳐 간 연인이기도,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을 스치는 낯선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그 별들을 ‘시절인연’이라 부른다. 순간의 불꽃처럼 반짝이다가도, 어떤 별은 하늘 한 켠에서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어떤 이는 밝게 빛나다가 금세 사라지고, 또 어떤 이는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내 길을 비춘다.


나는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보는 습관이 있다. 사진 속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달라진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던 손길이, 지금 돌아보면 마음의 닿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졌던 온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이었음을. 우리는 늘 서로에게 스쳐 지나가면서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마음 속에 작은 꽃을 심어놓는다.


시절인연은 때로 아주 작은 순간에 깊이 새겨진다. 내게는 그런 순간이 많았다. 봄날 아침,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공원에서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 그 눈빛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감정이었지만, 그때 느낀 따스함은 지금까지도 가슴 속에서 잔잔히 울린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인연이란, 꽃이 피고 지듯 자연스럽다. 누군가 내 삶에 들어오고, 또 스스로 떠나간다.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흔적은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마음의 어느 구석에 남아, 나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시절인연의 신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에 흔적을 남기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하고. 그 사람을 통해 나는 내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거나 차가운지, 얼마나 외롭거나 충만한지를 알게 된다. 어떤 시절인연은 거울 속에 나를 비추고, 어떤 시절인연은 내 안의 숨겨진 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나는 오래전의 친구를 떠올린다.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웃던 그 날의 기억. 함께 걷던 골목길, 손에 쥔 작은 빵의 온기, 서로에게 기대어 나눈 작은 위로.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순간이었지만, 그때는 그 순간이 전부였다. 우리가 함께 만든 기억은, 이미 흐른 시간이지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 또한 시절인연이다. 사랑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품고 있다. 처음 마주친 순간의 설렘과, 결국에는 서로의 길을 가야 하는 쓸쓸함까지. 나는 사랑의 끝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 사랑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사랑이 남긴 상처와 아픔도, 결국 나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시절인연을 감사히 떠올린다.


어느 날, 나는 오래된 공책을 펼쳤다. 손때 묻은 글자 사이로, 잊고 있던 이름들이 나타났다. 그 이름들은 모두 내 삶에 작은 빛을 비추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서로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름들을 부르며 미소 짓는다. 시절인연은 결국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다. 스스로를 지우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남아 있는 그림 같은 기억이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인연에게 편지를 쓴다. 실제로 보내지 않아도 좋다. 글을 쓰며 나는 그 사람과 다시 만난 듯한 감정을 느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오래전의 웃음과 울음이 섞여 작은 음악을 만들어낸다. 편지 속 단어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마음의 선율이다.


하루가 끝나고 창가에 앉아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을. 스쳐간 사람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함께했던 시간들은 내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붓이었다. 시절인연은 지나간 뒤에도 내 마음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며,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창가에 앉아, 오래된 바람과 햇살, 그리고 기억 속의 사람들을 느낀다. 그들이 남긴 향기와 온기는, 내 삶을 조금 더 풍부하게, 조금 더 깊게 만든다. 시절인연은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시절인연에게 작은 미소를 보낸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인사. 우리가 나눈 순간은 지나갔지만, 그 순간의 빛과 향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나를 오늘로 이끌었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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