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은 것 있으면 공유해 줘. 검색해 봐. 엄마플렉스야〉
― 주는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랑의 방식
새로운 언어다.
세상은 변했지만, 마음의 구조는 그대로다.
나는 화면을 스크롤하며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욕망이자
가장 새로운 소통의 방식은 ‘갖고 싶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말은 생존의 감정이자, 존재의 선언이다.
갖고 싶다는 건 ‘살아있다’는 신호다.
무언가를 향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장난감 가게 유리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다음에 사자.”
그 말은 거절이 아니라, 기다림의 언어였다.
기다림 속에서 욕망은 식지 않았고, 사랑은 더 깊어졌다.
이제는 내가 엄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은 조금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나는 검색한다.
비슷한 제품, 리뷰 별점, 가격 비교.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장바구니 담기’를 누른다.
그게 나의 플렉스다.
누군가는 쇼핑 중독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건 ‘주는 기쁨에 대한 확신’이다.
요즘 말로 ‘엄마플렉스’라 부르는 그것.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소비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변한 결과다.
나에게 ‘플렉스’는 존재의 증명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사주는 일은
그 사람을 내 삶에 초대하는 행위다.
“나는 여전히 너의 세계 안에 있다.”
그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언젠가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뭐 갖고 싶어?”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침묵했다.
‘갖고 싶다’는 말이 내 언어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엄마가 된다는 건 ‘갖지 않음’을 배우는 일이었다.
먼저 먹이고, 먼저 입히고, 먼저 자게 하는 삶.
그래서 내 마음은 늘 ‘나중에’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날 이후 마음속에 조용한 울림이 생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대답은 ‘아니요’였다.
나는 여전히 갖고 싶었다.
시간을, 온기를, 향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그건 물건보다 귀한, 존재의 온도였다.
요즘 나는 자주 검색한다.
물건보다 마음을, 이미지보다 감정을.
‘함께 보고 싶은 영화’, ‘같이 읽을 책’, ‘같이 먹고 싶은 음식’을 찾아본다.
그리고 링크를 보낸다.
“이거 어때?”
그건 내 방식의 ‘공유’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쓰고 싶은 마음,
그게 내가 지금 갖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해,
결국 ‘공유하고 싶다’는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 두 단어의 사이에
엄마의 인생이 있다.
갖고 싶다는 건 세상을 믿는 신호이고,
공유하고 싶다는 건 그 믿음을 나누겠다는 용기다.
어쩌면 ‘엄마플렉스’는 바로 그 용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진 사랑을 더 작게, 더 부드럽게 나누는 일.
과시가 아닌 포용의 제스처로서의 플렉스.
누군가는 그것을 ‘간섭’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믿는다.
이 세상에 지나친 사랑은 없다.
다만, 표현의 방식만 달라질 뿐이다.
밤이 깊어갈 때,
택배 문자가 도착한다.
“상품이 곧 도착합니다.”
그 문장은 내게 작은 안도감을 준다.
사랑도, 기억도, 결국 도착하는 것.
때로는 늦게, 그러나 반드시.
나는 내일 또 누군가의 ‘갖고 싶다’를 검색할 것이다.
그리고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그건 나의 언어이고, 나의 기도이며,
나의 존재 방식이다.
엄마의 세대는 ‘갖지 못해도 주는 법’을 배웠고,
지금의 세대는 ‘갖는 대신 나누는 법’을 배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배운다.
사랑은 검색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것임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한다.
“갖고 싶은 것 있으면 공유해 줘.
검색해 봐.
엄마플렉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