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생 친정 부친의 글입니다
「광혜원 소고」
나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마치고,
야생마가 초원을 마음껏 질주하듯이 자유기업 분야를 택하게 되었다.
영화 제작 기획도 해보고, 한국영화 수출 진흥 차 홍콩에 주재하면서
우리나라 영화를 세계 시장에 진출시키는 데 여러 해 동안 노력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수산물, 가정용품 및 잡화를 가지고
홍콩은 물론 프랑스, 미국, 일본, 필리핀을 위시하여
동남아 여러 나라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가는 곳마다 일거리는 많았는데,
심장이 덜컹거려서 마음껏 활동하지 못했다.
인간의 신체는 그 섬세함이 신의 조화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신도 어느 부분의 끝자락은 불완전한 채로 지나쳐 버린다.
그 부분을 인간의 몫으로 두는 것 같다.
한 번은 태국 출장을 가려고 짐을 챙겨 공항까지 나갔다가,
탑승 직전에 출장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적도 있다.
내 심장 상태는 심방세동으로서, 외국 여행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한때는 필리핀 최남단 민다나오(Mindanao) 섬 잠보앙가(Zamboanga)에 가서
코코넛을 쪼갠 물로 식수도 하고,
해변에서 거북이 알을 주워 삶아 먹으며 식사 대용으로 삼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에 가서,
열대 지방의 무더위와 싸우며 황옥해삼(Curry Fish)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리고 북미 대륙 서해안에 널려 있는
팔각해삼(Apostichopus parvimensis)을
미국의 왕혜선 사장과 3개년의 노력 끝에 상품화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태국의 가격이 저렴한 염장 해파리(Salted Jelly Fish)를 도입해
한국 시장에 안착시키기도 했다.
세계적인 프랑스 Arcoroc 회사의 우수한 품질의 유리·도자기 그릇을
한국 시장에 접목시키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심장이 문제가 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서울대병원, 현대중앙병원, 강남성모병원을 두루 거치고,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열심히 다녔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동기생 구선희가
신촌 세브란스로 와보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우리 집이 분당이라 신촌까지 다니기에는 너무 멀어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아 주저했더니,
나중에는 강요하다시피 하며 완강히 요청했다.
신촌 세브란스에는 깊은 인연이 있기도 하다.
박인서 선생, 김장환 교수, 조영숙 수간호원, 강민석 선생 등이 연고인이다.
나는 심장 외에는 아픈 데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종로 2가 청진동에 가서
구수한 해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
밤사이 뽀얗게 서리가 내린 마당을 가로질러
심혈관 병원에 도착하면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은 호주 시드니(Sydney)에 출장 가는 길이다.
공항으로 가는 길부터 심장이,
트럭이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덜컹거렸다.
항공기가 밤새도록 비행해 동이 틀 무렵이면 시드니에 도착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동네 홈닥터(당시 영주권 소지)에게 간다.
“심장 이상”이라고 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앰뷸런스를 급히 불러 1급 종합병원으로 보낸다.
종합병원에서는 중환자로 분류되어,
꼼짝없이 병실에서 모든 검사와 치료가 이루어진다.
주된 치료는 안정이다.
퇴원하고 싶어도 주치의의 허락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최소한 일주일은 입원해야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무료였다.
나는 시드니를 거점으로 멜버른, 태즈메이니아 섬,
북쪽으로 케언즈(Cairns), 그리고 피지(Fiji)까지 활동했으나,
늘 덜컹거리는 심장이 문제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장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어렵고 중요한 심장을 사람이 손댄다는 것이 문제였다.
걱정이 되어 전 가족이 수술실 앞에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이문형 교수님의 집도로 심장 시술이 시작되었다.
다소 시간이 경과되고 시술이 끝나자, 나는 눈을 떴다.
그 어려운 부위를 신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정상화시켰다.
나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 의술은 진짜 국보급이다.
이제 이문형 교수님께서 정년이 되어 퇴직하신다고 한다.
선생님의 고도의 의술과 숭고한 인품의 짙은 향기는
광혜원의 골짜기의 의생들에게 영원히 전수될 것이다.
2025년 8월 16일
589289 안 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