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마고우 홍영표

by 안순나



피렌체의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래된 자갈과 테라코타 지붕 위로 스며드는 햇살은 붉고 따스했다. 작은 카페와 과일가게, 장인의 공방 사이로 커다란 목제 문과 창문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에스프레소 향과 갓 구운 빵 향이 발걸음을 감쌌다. 아르노 강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둥근 돔과 종탑이 낮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연한 크림빛 리넨 블라우스 위에 베이지 스웨터를 걸치고, 하늘빛 스카프를 목에 살짝 두르며 울 코트를 손에 들었다. 부드러운 가죽 로퍼가 골목의 울퉁불퉁한 자갈을 밟을 때마다 조용한 울림이 발끝에서 전해졌다. 단정한 단발머리는 은은한 회색빛으로 빛났고, 눈가에는 브라운 톤 아이섀도, 연한 피치 립스틱이 얼굴빛에 온기를 더했다. 세월이 지나도 우아함과 소박함이 함께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장엄한 아치가 시선을 압도했다. 벽마다 걸린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시간을 넘어 나를 불러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속 필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국민학교 골목, 땅따먹기와 고무줄놀이, 장닭을 피해 달리던 소년소녀의 나날이 슬라이드처럼 펼쳐졌다. 라면땅을 나누며 웃고 떠들던 그 순간, 설탕과 소다로 뽑기를 만들던 작은 뽑기 가게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던 나와 홍영표. 모든 장면이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만화가게에서 하루 종일 입장료를 내고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엄희자의 만화책을 손에 들고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인형 같은 눈망울, 섬세한 선, 배경을 가득 채운 꽃과 레이스, 페이지마다 흐르는 감정은 내 마음속 피아노 선율처럼 울렸다. 홍영표는 부용의 만화책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중국 고전 의상을 입은 인물들의 장신구와 표정을 천천히 음미하며 그림 속 세계를 온전히 살아냈다. 나는 스무 권을 휙휙 넘겼지만, 홍영표는 한 장 한 장 머물며 그림 속 이야기를 음미했다. 우리의 속도와 시선은 달랐고, 그 차이가 서로를 배우는 즐거움이 되었다.

목욕탕, 시장, 동네 구멍가게, 라면땅 과자, 하루 종일 나누던 장난과 수다, 골목을 달리며 날리던 웃음소리. 어린 시절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였고, 서로의 모든 순간을 관찰하고 공유하며 우정을 쌓았다. 수돗물 소리, 비누 거품 냄새, 나무 의자에 앉아 서로의 머리를 씻기던 손길, 따뜻한 온기 속에서 웃고 떠들던 기억. 시장 골목의 떡볶이, 순대, 사과와 오렌지, 바삭한 과자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홍영표와 나는 하루를 채워갔다.

신혼 초, 시어머니 댁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홍영표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 한 통이면 위로와 조언을 받을 수 있었고, 아이들 교육과 고민을 나누며 마음을 붙들었다. 어린 시절 만화가게에서 배운 서로 다른 속도와 방식의 이해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의 토대가 되었다.

전시관 안 작품 하나하나가 마음속 어린 시절과 겹쳤다. 라파엘로의 섬세한 인물 초상, 보티첼리의 곡선과 색채, 빛이 살아 있는 회화, 석고 조각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까지. 갤러리 사이를 걸으며 어린 시절 필름을 다시 재생했다. 홍영표와 만화책 속에서 함께했던 시간, 골목 놀이, 뽑기 가게, 장닭 도망치기, 라면땅 나누기, 목욕탕과 시장, 웃음과 장난이 한 장면씩 겹쳐졌다.

전시관을 나와 아르노 강가를 따라 걸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강 위를 스쳐가는 작은 보트, 강변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이 어린 시절 골목 풍경과 겹쳐졌다. 마음속 필름은 계속 흐르고, 어린 시절과 지금의 내가 한 장면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웃고, 울고, 생각한다.

골목과 전시관, 강가, 햇살 속에서 나는 마음속 OST를 들었다. 어린 시절 골목과 만화가게, 라면땅과 뽑기 가게, 목욕탕의 소리와 향기, 모든 장면이 마음속에서 슬라이드처럼 흐른다. 홍영표는 여전히 내 마음속 증인이며, 우리의 우정은 유통기한 없는 선율처럼 계속 울린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시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홍영표와 함께한 유통기한 없는 우정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긴다.

햇살이 강물 위에서 반짝이고, 골목 풍경은 아련하다. 피렌체의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 골목과 만화가게, 라면땅과 뽑기 가게, 목욕탕의 소리와 향기를 마음속으로 느끼며 홍영표와의 우정을 천천히 되새긴다. 모든 순간이 내 마음속 OST처럼 울리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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