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나의 사용법
사람들은 나이를 숫자로 환산해 그 사람의 능숙함을 가늠하곤 한다.
예순다섯이라고 하면, 대개는 어느 정도 능란한 삶의 조종술을 갖춘 이로 본다.
삶이라는 복잡한 장치를 오래 다뤄온 숙련자,
대부분의 기능을 이미 파악하고, 웬만한 상황은 적당히 넘길 수 있는 사람.
나 역시 나 자신을 그렇게 믿었다.
무던하고 평범한 성격, 특별한 불평이 없는 사람.
남이 하자면 적당히 맞추고, 조금 불편해도 웃고 넘어갈 줄 알며,
그럭저럭 모두와 잘 지내는 사람.
인생을 크게 흔들지 않고, 마음의 골을 깊게 파지 않는 사람.
하지만 시간이란 것은 기묘한 힘을 지닌다.
살아가는 동안 쌓아 올린 수많은 경험들이
어느 날 불현듯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 깨달음은 무언가 거창한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순간,
너무 평범해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만한 순간 속에서
문득 내 안의 생각이 스쳤다
그 생각은 어떤 날 느끼는 피로보다도,
어떤 날의 기쁨보다도,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명료함을 가지고 내 안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바로 ‘나도 몰랐던 나의 사용법’의 첫 페이지였다.
믹스커피 — 익숙함이 뒤집히는 순간
어느 아침, 늘 그렇듯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달그락거리며 컵을 꺼내고, 손에 익숙한 동작으로 믹스커피 봉지를 뜯었다.
그 작은 봉지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은
한 시절의 기억을 바로 불러왔다.
아이들 학교 보내던 아침,
급하게 밥상을 치우던 부엌,
남편이 출근을 서두르던 그 시간들.
그 모든 순간에 늘 한 잔의 믹스커피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익숙함이 낯설었다.
향은 그대로였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스푼으로 몇 번 저은 뒤 천천히 입을 대었을 때
입 안에 퍼진 달달함이
예전처럼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 몸이 먼저 말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제 아니야.”
그 말은 불평도 아니고, 어깃장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조용하고, 정확했다.
나는 단 한 모금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차렸다.
내 입맛이 바뀐 만큼,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는 나의 내면도 이미 바뀌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블랙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이 혀에 남는지, 목에서 천천히 내려가는지,
그 잔잔함이 하루를 열기에 더 적당하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 무던한 사람일까?’
아니었다.
나는 꽤 정확한 사람이고,
내 안에는 작고 섬세한 저울이 있었다.
다만 그 소리를 너무 오래 듣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고등어 한 박스 — 충분함과 많음의 차이
며칠 뒤, 남편이 고등어 한 박스를 들고 왔다.
“여보는 이거 좋아하잖아.”
그 말에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처음 두세 마리까지는 정말 맛있었다.
굽는 동안 주방에 퍼지는 고소한 냄새,
익어가는 소리,
접시에 담긴 고등어의 따끈한 살점.
모두 다 좋았다.
그러나 네 번째를 앞에 두었을 때
손이 멈췄다.
입맛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몸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거기서 선을 그었다.
“지금은 더 원하지 않아.”
배가 고파도, 접시는 있지만, 손은 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오래 미뤄둔 사실 하나와 마주했다.
나는 원래 ‘많음’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나를 위해 준비한 풍성함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풍성함보다 ‘충분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똑같이 좋아하는 음식이어도
한두 번이면 충분한 사람.
많다고 든든한 게 아니라,
적당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 삶에서 무언가 부대끼거나 지쳐버리는 순간들 대부분이
양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음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도, 관계도,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풍부함이 아니라
딱 ‘적당하게 채워진 상태’였다.
그것은 고등어가 아니라
내 삶이 나에게 건넨 또 하나의 문장이었다.
나이 듦은 쇠퇴가 아니라, 신호의 명료함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 들면 몸이 귀찮아진다고 말한다.
뭐가 잘 안 보이고, 뭐가 자꾸 아프고,
예전 같지 않다고 투덜거리곤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몸이 귀찮아지는 게 아니라
몸이 더 명료해진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무릎이 조금 시큰해도
“뭐, 별일 있겠어.” 하고 넘겼다.
눈이 침침해져도
“피곤해서 그렇겠지.” 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멈춰도 괜찮아.”
“조금 천천히 해도 돼.”
“너한테 이건 부담이야.”
몸의 변화는 단순한 노화의 증거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가리키는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단맛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쓴맛에서 안정을 찾게 되는 것도
내 인생의 무게중심이 자연스럽게 옮겨갔기 때문일 것이다.
젊을 때는 단맛이 필요하다.
빨리 위로받고 싶고,
금방 기운을 차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쓴맛을 천천히 음미할 여유가 생겼다.
그 깊이를 감당할 마음이 생겼다.
몸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신호를 놓쳤다.
가족을 먼저 챙기느라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늘 마지막 순서였다.
이제는 그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몸이 보내는 말은 언제나 정확하다.
그 말을 듣는 데 늦었을 뿐이다.
예순다섯, 나의 사용설명서
삶에는 원래 설명서가 없다.
살다 보면 생기고, 실수하면 고쳐 쓰고,
언젠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우리는 그 설명서를 계속 쓰고 지우는 존재들이다.
그 설명서의 첫 장은
누구나 살아온 시간만큼 다르고,
마지막 장은 누구도 아직 적지 못했다.
예순다섯이 되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잘 아는 줄 알았지만
정작 중요한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음식이 많으면 오히려 먹지 못하는 사람이고,
단순한 맛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이며,
남을 먼저 챙기느라 나를 뒤로 미루는 사람이고,
사실은 까다로운 게 아니라 ‘정확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65년이 걸렸다.
나이 든다는 건 줄어드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진짜 나만 남는 것.
그게 바로 나이 듦의 선물이었다.
취향을 알아간다는 건 나를 알아가는 일
오래전에는
“난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 말이 괜찮은 사람의 기준처럼 느껴졌다.
어디에나 잘 섞이고,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
그런 내가 성숙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런 내가 더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사람보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
삶을 더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나를 정확히 아는 것 같다.
나는
소소한 것을 오래 음미하는 사람이고,
달콤함보다 담백함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이고,
넉넉함보다 적당함이 더 잘 맞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나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했다.
취향을 알아간다는 건
결국 나를 알아가는 일이다.
타인을 위한 삶에서
조금씩 나를 위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나에게 보내는 선언문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자주 선택할 것.
몸의 신호를 투정이 아닌 안내로 들을 것.
누구의 입맛보다 내 입맛을 먼저 존중할 것.
마음이 싫다고 말하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을 것.
적당함을 사랑하는 나의 감각을 믿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 가지—
나를 알아가는 일은 늦어도 괜찮다.
지금 깨닫는 내가 진짜 나니까.
나는 앞으로도 나를 계속 알아갈 것이다.
내 몸이 말하는 소리,
내 마음이 건네는 문장,
내 취향이 보여주는 방향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정확히,
한 페이지씩 읽어가면서.
그것이 예순다섯의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용설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