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한 건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의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워 있을 때
문득 ‘엄마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불쑥 스쳤다.
그래서 나는 가끔 자고 있는 엄마의 숨소리를 확인하곤 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음이란 게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사라질까 봐
내 세상이 통째로 무너질까 봐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20대 후반쯤이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이번엔 ‘나의 죽음’이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끔은 잠들기 전
깊은 어둠 속에서 그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가슴이 철렁하고
세상은 멈춘 듯 고요해졌다.
그럴 때면
내 안에서만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공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즈음엔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느린 예행연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장례식장에서도 / 흰 국화 향기 속에서도
죽음이란 게 생각보다 조용하고 담담하다는 걸 안다.
두려움 대신 남은 건
언젠가 그 문턱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묘한 평온이었다.
요즘엔 오히려
죽음 이후가 걱정이다.
내가 떠난 뒤
슬퍼할 가족들이 마음에 걸린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남은 사람에게 긴 회복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기를 견디는 일은
오롯이 산 사람의 몫이다.
생각해 보니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건
조금은 지나친 오지랖일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주변 정리, 그게 먼저 아닐까?”
하지만 곧 의문이 따라온다.
“언제 죽을 줄 알고 정리를 하라는 거지?”
바로 그 질문 안에 답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언제부터?
60대? 70대? 80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시기’란 없다.
죽음에는 정해진 타이밍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죽음을 준비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언젠가 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는다.
재산도, 명예도, 관계도
그 순간엔 덧없는 이름표에 불과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이 또렷해진다.
오늘의 공기/누군가의 온기/나를 스치는 빛
그 모든 것들이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끝날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끝을 향해 조용히 삶을 다듬는 것.
그게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내일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거창한 일들이 아니었다.
입지 않는 옷, 낡은 속옷
몇 장 쓰다가 수북히 쌓아놓은 다이어리
서랍 속 쓸모를 알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죽어서도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를 정해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자 늘 작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숨 쉴 틈이 생겼다.
죽음을 떠올렸을 뿐인데
삶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끝이
‘지금의 나’를 바꿔놓은 것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결국 ‘지금’을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신기한건, 끝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죽음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살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