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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지웠는데, 왜 네가 남아있지?

영화 이터널 선샤인 그리고 우리 안의 감정 기억체

by LAEAZY
어제 '지구 최후의 밤'을 보며 상상했다.
산사태보다 무서운 건,
기억 속에 갇혀 영원히 산다는 것.

그리고 오늘,
나는 또다시 그 질문에 갇혔다.
기억을 없앴는데도,
왜 너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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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삭제하면 감정도 사라질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다.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감정은 몸에 남는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차이를,

기억을 '지운 후에야' 비로소 보여준다.


조엘이 기억삭제 기계를 쓴 후,

머릿속 사랑의 흔적을 하나씩 삭제당할 때,

우리는 그 기억의 감정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생명을 갖고 있는지를 목격한다.


그 장면들은 죽지 않는다.

도망친다.

숨는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도 소리로,

차 안에 비친 눈빛으로.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삭제 명령어로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정은

기억의 '결과'가 아니라,

기억을 만들어낸 '원천'이기 때문이다.


조엘은 그걸 알지 못했다.

그가 클레멘타인을 지우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상처를 지운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워진 건

그녀의 이름과 생일,

대화와 장소였을 뿐.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그 모든 삭제의 순간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그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지우려다

발목까지 빠지는 것과도 같다.


찰리 카우프만은 우리에게 말한다.

감정은 흔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남는 것이라고.


기억은 편집할 수 있지만,

감정은 편집하는 나의 감정까지도 포함해서

나를 다시 구성한다.


그래서 결국,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지워진 기억의 끝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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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또 싸울 거야.
서로 상처 줄 거고, 실망할 거고, 후회할지도 몰라."

"알아. 그래도 괜찮아."

그 대답 속엔

완벽한 기억도,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고집스러운 감정과 숭고한 사랑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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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지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사랑은, 기억 속에 살지 않아.

그건 너와 마주쳤을 때,

다시 시작되는 거니까.


이터널 선샤인은 그걸 말한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피어난 감정이
결국,
우리를 또다시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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