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잔에 머무는 다정한 그림자에 대하여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남기고 간, 지워지지 않을 찰나의 기록

by 하카나이

창가에 둔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늦은 오후의 볕이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소란함에서 한 걸음 비껴 난 이 좁고 어두운 방에서, 얼굴 모를 당신에게 조심스레 안부를 묻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인연과 스쳐 지나갑니다. 가벼운 바람처럼 옷깃만 스치고 흩어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엔가는 내 마음의 가장 깊고 서늘한 바닥까지 기꺼이 내어주게 되는 무거운 관계를 맺기도 하지요.



하지만 삶이란 참으로 기묘해서, 때로는 아주 잠깐, 아무런 말 없이 같은 공간의 공기만을 나누어 마신 완벽한 타인에게서 가장 짙은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 낮, 제가 지키는 이 고요한 은신처에는 각자의 품에 책 한 권씩을 소중히 안고 들어오신 두 분의 손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낯선 공간이 주는 묵직한 어둠과 적막 속에서도, 두 분은 전혀 서두르거나 경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의 공기와 온도를 알고 계셨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창가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 짐을 내려놓으셨지요.



저는 숨을 죽인 채,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정성스러운 속도로 물을 끓였습니다.

화사한 산미가 새벽의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차가운 얼음 사이로 짙은 커피가 서서히 스며드는 아이스 카페 오 레 한 잔. 저는 두 분의 각기 다른 마음 날씨를 담아낸 그 잔들을 투박한 종이 메모와 함께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습니다.



이곳의 유일한 규칙인 '침묵과 사색'을 이미 온몸으로 이해하신 듯, 두 분은 이내 자신만의 활자 속으로 깊이 빠져드셨습니다.



벚꽃나무 아래. 가지이 모토지로




테이블 한편에 놓아둔 소설 속 문장처럼, 어쩌면 우리 마음속의 깊은 우울과 슬픔은 억지로 외면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마주하고 완성해 낼 때 비로소 온화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 분이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낸 그 무해하고 고요한 풍경이 참으로 고마워, 저는 갓 데워낸 마들렌을 말없이 곁들여 드렸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분이 문을 열고 다시 소란한 세상 밖으로 떠나신 후, 빈 테이블을 치우러 다가간 제 눈앞에는 이런 풍경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말끔히 비워진 투명한 잔과 유리컵. 그리고 아주 작은 빵 부스러기 하나만 외롭게 남은 비취색 접시.



사물이 금방 스러지고 사라지기에 비로소 아름답다는 뜻의 '하카나이(儚い)'.

저는 그 이름처럼, 두 분이 남기고 간 이 완벽한 소멸의 흔적을 보며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언가가 가득 채워져 있던 자리가 이토록 단정하고 아름답게 비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제가 묵묵히 볶아낸 찰나의 시간에 대한, 가장 다정하고도 깊은 무언(無言)의 찬사였습니다.



오늘 이 공간에 머물렀던 두 분과 제가, 앞으로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분이 머물다 간 그 다정한 여백과 희미한 온기는, 제가 앞으로 수없이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리는 긴 시간 동안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간 그곳의 일상도, 오늘 제가 마주한 저 비워진 잔처럼 평온하시기를 먼발치서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여운 속에서

어느 마스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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