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는 곳에서 건네는 위로 한 잔
세상의 모든 날 선 시선들에 베여, 어디로도 숨을 곳 없는 막막한 밤이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속으로만 수백 번 울음을 삼켜야 했던 오늘. 일산의 낡고 좁은 골목 끝,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은신처 하카나이(儚い)에서 당신의 지친 어깨에 조용히 안부를 건넵니다.
영화 <유랑의 달>에서 세상의 폭력적인 잣대에 난도질당한 채 비를 맞고 서 있던 사라사에게, 후미는 "무슨 일이 있었어? 괜찮아?"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저 젖은 머리를 닦을 수건을 건네고, 차가운 얼음이 담긴 커피 한 잔을 묵묵히 내어줄 뿐입니다.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슬픔을 마주할 수 있도록, 어떠한 판단이나 요구도 없는 완벽한 거리감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후미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작고 어두운 방에서 제가 당신을 위해 얼음을 깎고 물을 끓이는 마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오늘 하루 얼마나 버거운 무게를 견뎌냈는지, 관계 속에서 어떤 날카로운 말들에 베여 마음이 찢겼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억지로 괜찮은 척 웃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왜 이토록 지쳐 있는지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젖은 마음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계시면 됩니다.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투명한 잔에 얼음을 채워 차가운 우유 위로 짙은 커피를 천천히 흘려보내겠습니다.
검은 커피와 하얀 우유의 경계가 스르륵 무너져 내리며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십시오. 이 덧없이 녹아내리는 찰나의 섞임이, 당신의 단단하게 굳어있던 슬픔마저 조용히 허물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실을 안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자들입니다.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지만, 아주 잠시나마 날 선 경계를 풀고 젖은 날개를 쉴 수 있는 처마 밑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완벽한 타인이 건네는 이 무해한 침묵 속에서,
당신의 길고 고독한 유랑이 잠시나마 다정한 닻을 내리기를.
세상이 버거울 때, 언제든 이 고요한 방으로 숨어 들어오십시오.
당신의 평온을 곁에서 지키는 곳,
하카나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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