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굽는 시간

6. 시간이 멈춘 날

by 양송이


서연은 낡은 일기장을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기록.


일기장의 글씨는 레시피북의 글씨처럼 반듯하고 정갈했다. 서연은 손끝으로 종이를 매만지며 일기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1924년 6월 8일


나는 한양에서 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떨어진 마을의 대저택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먹을 것과 잠잘 곳도 제공된다고 했다.


나는 선택지가 없었다.


집을 꾸려 이곳, 달오름 마을로 왔다.


마을로 오는 길은 힘들었다. 깊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산짐승이라도 마주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예상보다 더 놀라운 곳이었다.


이 깊은 산골 마을에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저택이 있을 줄은 몰랐다.


1924년 6월 10일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박윤석 대감의 저택이었다.


박윤석 대감의 저택은 마을에서도 단연코 으뜸이었다. 기와가 얹힌 담장 안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고, 집 안은 화려한 병풍과 자개장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곳에서 부엌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마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윤석 대감의 아들은 동경에서 유학을 하고 왔고, 대감마님은 일본 사람이라고 했다.


박윤석 대감도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한때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고,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달오름 마을로 숨어들었다고 했다.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1924년 6월 26일


오늘은 박진호 도련님의 생일이었고, 처음으로 케이크라는 것을 보았다.


잔치를 준비하는데 서양에서 건너온 요리사가 하얀 크림을 바른 둥그런 빵을 만들었다. 나는 부엌 한쪽에서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먹어볼래?"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도련님이었다.


그 달콤한 냄새, 촉촉한 빵과 부드러운 크림.


황홀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맛이었다.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1924년 9월 15일


나는 도련님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이 마을, 답답하지 않아?"


어느 날 마당에서 떨어진 꽃잎을 줍던 나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기둥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 바다도 보고 싶고, 한양의 번화가도 걸어보고 싶어.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


나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1924년 10월 28일


도련님의 생일 이후로 부엌일을 하며 요리사에게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어느새 그럴듯하게 케이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케이크를 만드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너는 언젠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도련님은 내 케이크를 맛 보여 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의 말이 정말 따듯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나는 그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있었다.


1925년 5월 1일


우리는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우리가 함께 하려면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박윤석 대감은 이 마을에 들어온 뒤로 자신의 가족들에게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대감의 뜻을 거스르고 이곳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금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와 내가 함께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


1925년 5월 23일, 달오름 마을.


매연과 진호는 밤을 틈타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횃불을 든 사람들의 무리가 매연과 진호를 쫓아왔다. 둘은 손은 맞잡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람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매연이 진호의 손을 놓쳤다. 진호는 매연의 등을 세게 밀었다. 매연은 다시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진호의 몸이 휘청이며 발이 미끄러졌다.


도망치던 매연은 멈춰 서서 울부짖었다.


"진호야!"


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매연이 본 그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그리고, 진호가 우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마을의 모든 것이 멈췄다. 마을에 울려 퍼지던 사람들의 소리도, 바람도, 횃불의 흔들림도. 둘을 쫓던 사람들도 놀라서 자리에 멈춰 섰다.


11시 50분.


매연은 가까스로 마을을 탈출할 수 있었다.


-


서연은 손끝이 저려오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두려움 때문이었지. 이 마을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


아주 먼 옛날, 달오름 마을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졌고, 더 이상 캐 먹을 나무뿌리조차도 없었다. 배가 고파진 사람들은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방랑자가 달오름 마을을 찾아왔다. 그는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깊은 우물을 파시오. 이 우물은 마을을 지켜줄 힘을 가질 것이오."


사람들은 방랑자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그가 서있던 자리에 우물을 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점차 생기를 되찾았고, 방랑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 가지 경고를 남겼다.


"이 우물은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마을을 보호하는 우물이오. 절대로 우물을 더럽히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이 재앙을 맞이할 것이오.

그 후, 방랑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우물의 물은 늘 맑았고,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우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마을을 보호하고, 시간과 기억을 보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우물은 마을을 보호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그 힘이 언제나 선한 것만은 아니었어."


서연은 손에 쥔 일기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날 박진호가 우물에 빠지던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이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기억 속에서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 듯했다.


"전설에 따르면 우물은 마을을 보호하는 존재야. 외부의 위험과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줬었지. 하지만 그날, 우물은 마을을 보호하는 대신... 시간을 멈추어 버렸어."


"왜요?"


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우물은 마을 사람들의 강한 감정에 반응해. 두려움, 절망, 분노, 그리고... 사랑까지도. 그날 밤, 박진호가 우물로 떨어졌을 때 그의 절말과 한매연의 공포, 그리고 마을 사람이 가진 두려움과 죄책감이 우물에 스며들었어. 우물은 그 감정을 흡수하고, 마을의 시간을 얼려버린 거야."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시간이 멈춘 거예요?"


"그래. 박진호의 죽음과 함께 마을의 시간도 멈춰버렸지. 마치 그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이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박진호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야. 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


서연은 숨을 삼켰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는 우물에 갇혔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을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이현이 이어 말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그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어. 그는 우물 속에서 마을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거지. 멈춘 시간 속에서."


서연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갔다.


그렇다면, 우물 앞에서 서연에게만 들렸던 그 목소리는 박진호의 목소리인 걸까.


"박진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걸까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아득해진 기분으로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이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이 마을에 온 이유를 찾아야 해. 네 외할머니가 살았던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온 이유. 그리고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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