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잊혀진 이름
서연은 황 씨 할머니가 건넨 말을 되새기며 멍하니 서 있었다.
"혹시 한매연을 알아요?"
그 이름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서연의 외할머니, 한매연.
서연이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다정한 미소와 따듯한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늘 손수 구운 빵을 내어주었다. 부드러운 식빵 위에 딸기잼을 발라주며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그런데, 황 씨 할머니가 어떻게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어... 어떻게 그 이름을 아세요?"
서연은 얼어붙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 씨 할머니는 잠시 말을 망설이는 듯했다. 레시피 북을 매만지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요. 이 레시피북... 매연이가 직접 쓰던 거예요."
서연의 심장이 순간 세게 뛰었다.
"할머니가요...?"
서연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레시피북은 엄마가 물려주신 거였다. 서연이 어릴 때부터 엄마는 이 레시피북을 소중하게 다뤘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서연에게 이 책을 넘겨주며 말했다.
"언젠가 네가 정말 힘들 때, 이 책이 너를 지켜줄 거야."
-
"정말... 이 레시피북이 할머니 거였다고요?"
서연은 레시피북을 다시 펼쳐 보았다. 페이지 구석에는 정갈한 글씨로 짧은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따듯한 봄바람이 부는 날에는 라벤더 쿠키.'
'비 오는 날에는 녹진한 버터향이 가득한 휘낭시에.'
'햇살 좋은 날에는 폭신폭신한 허니 카스텔라.'
그리고 그 아래에 연필로 흐릿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달오름 마을에서...'
수도 없이 펼쳐봤던 레시피 북이었지만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순간 서연은 무언가 깨달은 듯 황 씨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외할머니가 이 마을에 살았던 거예요?"
황 씨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레시피북을 덮었다.
"그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지겠지."
서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무작정 떠나온 마을이 할머니가 살았었던 마을이라니. 왜 할머니나 엄마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서연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황 씨 할머니의 표정은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말씀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아가씨는 이 마을에 조금 더 머물러야 할 거예요. 지금은 말해줘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마치 서연이 이 마을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황 씨 할머니의 알 수 없는 말에 서연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아가씨, 이건 확실해요."
황 씨 할머니는 서연의 손 위에 레시피북을 다시 올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이 마을에 온 건 우연이 아니에요."
-
서연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이 마을에 살았었다는 사실. 그리고 황 씨 할머니의 의미심장한 말. 그리고 백구가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이유. 하나씩 되짚어 보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저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서연은 베개를 뒤집어 눌렀다. 괜히 창문을 열고 희푸른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을은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정적.
그리고 그런 정적 속에서 문득 이현의 말들이 떠올랐다.
'이 마을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어.'
'그 개가 널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고 따라가는 거야?'
그도 무언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똑바로 대답해 준 적은 없었다.
'이현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서연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른 아침, 서연은 황 씨 할머니의 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이현의 공방으로 향했다.
'여기였지.'
이현의 공방은 마을의 끝자락에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의 커다란 창문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연은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가 창 너머로 공방 안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그가 있었다.
이현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흙이 묻은 손, 가볍게 걷어붙인 셔츠 소매. 회갈색 도자기 흙을 천천히 빚고 있는 그의 얼굴이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서연은 잠시 말을 잃고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현의 손끝에서 형태를 갖춰가는 도자기.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손놀림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
서연은 움찔 하며 뒷걸음쳤다.
"아... 방금."
이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흙을 닦아내며 서연에게 다가왔다. 방금까지 작업에 집중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그의 셔츠 단추가 한두 개 풀어져 있었고, 작업에 몰두한 탓인지 목덜미에 땀이 맺혀 있었다. 서연은 다가오는 이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서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본론을 꺼냈다.
"이 마을에서... 제 외할머니가 살았다고 해요."
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
"황 씨 할머니한테 들었어요."
이현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마을과 제 가족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알고 싶어요."
이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서연은 살짝 당황했다.
"강이현 씨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을에 대해 말할 때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기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야."
"왜요?"
서연은 답답한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망설임과 혼란이 뒤섰여 있었다.
'역시,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어.'
그때, 서연의 손에 들린 레시피북이 눈에 띄었다. 이현은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제 외할머니가 남긴 레시피북이에요. 엄마가 남긴 유품이기도 하고요."
서연이 이어서 말했다.
"혹시 한매연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공방 안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 이름을 들은 이현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따라와. 나랑 갈 곳이 있어."
이현의 목소리를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낮고 단호했다. 서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서둘러 문을 나서는 이현의 뒤를 따라나섰다.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곧 알게 돼."
이현은 서연을 데리고 마을의 좁은 골목을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빨랐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마을 끝자락에 다다랐다.
낡은 폐가였다.
담이 무너져가고 지붕은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된 나무 문은 기울어져 있었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이현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가 네 외할머니가 살았던 집이야."
서연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여기... 여기 가요?"
"그래. 한매연이 살았던 집."
서연이 얼어붙은 채 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살았던 곳. 그리고 지금은 폐허가 돼버린 집.
'믿을 수 없어.'
이현이 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섰다.
삐걱-
문이 열리며 먼지 쌓인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가구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고 벽 한쪽에는 금이 간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환영이 스쳤다.
흐릿한 형체,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
"여기서 떠나야 해."
"날 믿어, 매연아."
-
서연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이현이 재빨리 서연을 잡아주었다.
"왜 그래. 괜찮아?"
"방금... 또 뭔가를 봤어요."
이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억이 떠오른 거야?"
"기억이라기보단... 그냥 환영 같았어요."
서연의 말을 들은 이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벽장 한쪽을 가리켰다.
"저걸 봐."
서연은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벽장 안에는 일기장이 있었다. 일기장의 표지 한쪽에 구석에 한매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연은 손을 뻗어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서연은 첫 장을 넘었다. 그리고 거기엔 100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25년 5월 23일.
"1925년...?"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한 장씩 넘겼다. 일기장을 넘기던 서연의 손이 마지막장에서 멈췄다. 마지막 장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시간이 멈춘 순간, 나는 사라졌다."
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이현은 벽에 기대어 서서 말했다.
"이 마을은 100년 전에 저주로 시간이 멈췄어. 그리고 네 외할머니인 한매연은 그 저주와 깊은 관련이 있었어."
서연은 숨을 삼켰다.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탈출하려 했어."
서연은 일기장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문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순간, 나는 사라졌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손녀가 달오름 마을로 돌아왔다.
서연은 깨달았다.
'나는... 이 저주와 연결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