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5월의 레몬케이크
서연은 강이현의 작업실을 나와 황 씨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서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우물에서 본 환영,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돌아왔구나."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서연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헷갈릴 뿐이야.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때 배에서 작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서연은 1층의 주방으로 갔다. 방에는 주방이 없으니 내려와서 주방을 써도 된다고 황 씨 할머니가 일러주었다. 부엌은 단정했다. 작은 오븐과 찬장이 있는 소박한 주방.
한쪽에는 유리병에 담긴 각종 향신료와 허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웬만한 재료는 다 있는 듯했다. 서랍을 열고 스테인리스 거품기를 꺼내 들었다.
서연은 핸드백에 넣어 온 엄마의 레시피북을 펼쳤다. 서연은 위로받고 싶은 날이면 엄마의 레시피북에 있는 케이크를 구워보곤 했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다.
'5월의 레몬케이크' / 160도 35분
레몬 2개 분량의 제스트
레몬즙 20g
설탕 150g
버터 150g
밀가루 150g
아몬드가루 30g
계란 130g
베이킹파우더 3g
우유 10ml
레몬 1개 분량의 레몬즙과 슈가파우더
서연은 오븐을 켜고 반죽을 시작했다.
부드러워진 버터를 풀어주고 설탕을 나눠가며 넣었다. 버터의 부피가 올라오고 뽀얀 미색이 될 때까지 섞은 뒤 계란을 조금씩 넣어가며 저었다. 오랜만의 손 반죽에 팔과 어깨가 뻐근해졌지만 오직 손 끝에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계란이 완전히 섞이고 난 뒤, 밀가루와 아몬드가루, 베이킹파우더를 채 쳐 넣고 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가볍게 섞는다. 그러고 나서 레몬즙과 우유를 넣고 반죽을 마무리했다.
황 씨 할머니의 찬장에서 레몬케이크를 굽기에 적당한 파운드 틀을 하나 꺼냈다.
틀에 버터를 꼼꼼히 발라주고 반죽을 틀에 부었다.
띠링
때마침 오븐의 예열이 끝난 알림음이 들렸다. 오븐에 완성된 반죽을 넣었다.
"..."
서연은 오븐의 작은 유리 너머로 케이크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오븐 속에서 버터와 레몬향이 어우러져 주방 가득 퍼지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큼한 냄새.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5월의 레몬케이크.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에 서연은 엄마와 함께 자주 케이크를 만들었다. 서연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건 특별한 케이크야."
"왜요?"
"행복해지고 싶을 때, 만들어서 한 입 맛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엄마의 말이 맞았다. 레몬케이크는 언제나 행복한 맛이었다. 서연에게 베이킹은 따듯한 기억이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서연은 케이크 만드는 일을 정말 좋아했다.
-
서울의 한 디저트샵. '파티세리 륀'
하얀 유니폼을 차려입은 서연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파티세리 륀‘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디저트 샵이었고, 서연은 그곳에서 스타 파티쉐로 주목받고 있었다. 매장의 오픈 시간에는 늘 문 밖으로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서연의 디저트는 인기가 많았고, 예약은 몇 달씩 밀려 있었다.
그녀의 디저트를 맛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건 서연의 행복이기도 했다.
"역시 윤서연 셰프님이 만든 디저트는 달라요."
"이 무스케이크, 정말 환상적이에요."
"이번 신메뉴도 대박 날 것 같아요."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서연은 마치 꼭대기에 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꼭대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몰랐다.
매일같이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얼마나 무거운지. 새로운 레시피를 고민하고, 손님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이 점점 커졌다.
언론에서는 서연을 '천재 파티시에'라 칭하며 성공 스토리를 조명했다.
"윤서연 셰프님, 다음 신제품의 콘셉트는 어떤 건가요?"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 디저트를 만들었나요?"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게.
케이크 위에 크림을 짜다가 문득 손이 떨이는 걸 느낀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셰프님, 이번 달 신메뉴 시안을 준비해 주셔야 해요."
"이번엔 더 특별한 게 필요해요.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디저트에는 감흥이 없거든요."
"지난번보다 더 강렬한 콘셉트가 필요해요."
서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연이 만들고 싶은 케이크는 단순했다. 먹는 사람의 마을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소박한 디저트. 그러나 사람들은 더 화려한 것, 더 트렌디한 것을 원했고 서연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스타일을 잃어갔다.
그즈음, 서연은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베이킹을 할 수 없다는 걸.
그러던 어느 날, 오븐 앞에서 다 구워진 케이크 시트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셰프님, 괜찮으세요?"
"...... 네?"
주방 스태프의 목소리에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어요."
서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케이크 시트를 들고 있는 서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서연은 당황해서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런데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그날 이후, 그녀의 손은 더 자주 더 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처럼 완성도 높은 디저트를 만들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님들에게 내놓을 디저트를 만들면서도, 정작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 서연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베이킹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
띠링
오븐의 알림음이 울렸다.
서연은 오븐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서연의 손이 전혀 떨리지 않고 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레몬케이크의 표면은 매끄럽게 빛났다. 진한 레몬 향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식기 전에 얼른 준비해 놓은 레몬즙을 붓으로 발라줬다. 한 김 식히고 난 뒤 틀을 뒤집어 케이크를 꺼냈다.
작은 볼에 레몬즙과 슈가파우더를 넣어 아이싱을 만들었다. 스푼으로 천천히 아이싱을 흘려내리자, 투명한 유약처럼 반짝이는 코팅이 케이크를 감쌌다.
서연은 작은 포크를 들고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푹신하면서도 묵직한 식감과 녹진한 버터향, 그리고 상큼한 레몬의 조화. 바로 서연이 원하는 맛이었다.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행복해지고 싶을 때, 만들어서 한 입 맛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그 말이 떠오르며,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냄새가 나네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황 씨 할머니가 어느새 주방에 와 있었다.
"케이크를 구웠나 보네요."
황 씨 할머니가 서연의 접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레몬케이크예요."
"레몬케이크."
황 씨 할머니 작게 중얼거렸다. 서연은 조각 하나를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한 번 드셔보세요."
황 씨 할머니는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가 접시를 받아 들고는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포크로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케이크를 맛보던 황 씨 할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떠세요? 입에 맞으세요?"
"...... 정말 맛있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이 맛..."
황 씨 할머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
딸각.
그때 광장의 시곗바늘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
"예전에 이 마을에서도 레몬케이크를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아가씨 케이크에서 그 맛이 나. 정말 신기하네."
"정말요? 신기하네요. 저는 엄마의 레시피 북을 보고 만들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황 씨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레시피 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을까요?"
황 씨 할머니의 말에 서연이 선반 아래 펼쳐져 있던 레시피 북을 닫아 건넸다. 레시피 북을 본 황 씨 할머니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이... 이걸 어떻게..."
황 씨 할머니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혹시 한매연을 알아요?"
그 이름을 들은 서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매연. 서연의 외할머니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