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구의 발걸음을 따라
백구는 가벼운 걸음으로 앞서갔다. 백구는 여러 번 다녀본 길인 듯 익숙하게 앞서가며 서연을 이끌었다. 서연은 백구의 뒤를 따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참 신기한 강아지야.'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돌길, 역시나 너무 조용했다. 마을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지?'
한참을 따라 걷다 내심 불안해진 서연은 몇 번이고 돌아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백구는 멈춰 서서 서연을 바라보았다.
'너는 가야 해.'
백구의 눈빛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구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골목길 끝에 있는 높다란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낡고 거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은 듯했다.
문 앞에서 백구가 멈춰 섰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끼익-
낡은 경첩이 오랜만에 움직였다는 듯 거친 비명 소리를 냈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 너머로 한적한 정원이 펼쳐졌다. 나무들은 울창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 있었다. 낡은 문과는 달리 너무나 잘 정돈되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이런 곳에 이렇게 예쁜 정원이 다 있네.'
서연은 정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걷던 서연은 무성한 수풀 사이의 돌담 너머에서 우물을 발견했다. 이끼로 뒤덮인 돌들, 금이 간 가장 가리.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만히 우물을 바라보았다. 돌담 뒤 누군가 숨겨놓은 듯한 우물의 모습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 순간, 눈앞의 풍경이 흐려지며 어떤 기억이 서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작은 손을 잡아끌며 누군가가 말했다.
"조용히 해야 해. 들키면 안 돼."
노을빛이 내려앉은 숲길, 그곳에는 우물이 있었다.
"여긴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이야."
그리고
누군가가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이게 대체 뭐지...?'
서연은 우물로 가까이 다가가 가장자리에 서서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우물의 물결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물 위로 희미하게 무언가가 나타났다. 서연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바람에 일렁인 물결 때문인 걸까. 서연은 환상을 본 것 같았다. 누군가가 우물 속에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기서 뭐 해."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서연은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다.
또 그 남자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여긴 들어오면 안 돼."
서연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냥 개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그 개가 널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고 따라가는 거야?"
서연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서연은 무작정 백구를 따라 또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떠오른 그 기억은 무엇일까? 왜 이 우물 앞에 서자마자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을까?
남자가 서연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긴..."
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우물을 바라보았다. 순간 남자의 눈에는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
"왜요?"
"여긴 위험해."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죠?"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한 번 더 우물 안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햇빛이 우물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물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리고 서연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구나."
그 소리에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가슴이 조여왔다. 두통이 몰려오며 귓가엔 웅웅 거리는 소음이 가득 찼다. 눈앞이 하얘졌다. 몸속에서 모든 게 뒤섞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남자가 서연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지금은... 여기 있으면 안 돼."
서연은 저항할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정신 차려!"
서연은 눈을 감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임이 울렸다.
"기억해. 반드시 기억해내야 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봐. 정신 차려."
서연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지러워요."
서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남자는 서연을 부축하며 똑바로 세우려 했지만 여전히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업어야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곤 서연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등에 업힌 서연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때, 우물의 물결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마치 멈춰 있던 시간이 깨어나려는 듯이.
-
눈을 뜨자 낮은 천장이 보였다. 방 안은 은은한 흙냄새로 가득했다. 창문 너머로 오후의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네."
그 남자였다. 그는 방 한쪽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여긴 어디예요?"
"내 작업실이야."
서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다란 나무 선반, 그 위에 진열된 다양한 모양의 도자기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그렇지. 그냥 길바닥에 두고 갈 순 없으니까."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서연은 여전히 남아있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문질렀다.
"... 갑자기 내가 왜 쓰러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한데."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그 우물 근처에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근데 당신은..."
그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온 마을에서 우물을 보고 기절할 정도로 반응했다. 이상하지 않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이 마을에 처음 온 걸까? 하지만 우물을 본 순간 떠올랐던 기억의 조각들. 그건 분명 서연의 것이었다.
'그럴 리 없어. 난 여기 처음 왔잖아.'
서연은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여전히 기억의 조각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그때 백구가 방 안으로 들어와 서연의 옆에 앉았다. 매번 길을 안내해 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건 처음이었다. 서연은 무심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했다. 손 끝에 닿는 풍성한 털의 촉감도 낯설지 않았다.
"......"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연은 백구의 부드러운 털을 연신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강이현."
그는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서연은 작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윤서연이예요."
이현은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서연은 또다시 짧은 기억이 떠올랐다.
노을빛 아래 작은 손을 맞잡고 서 있던 아이들. 그리고 희미한 웃음소리.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서연은 손을 황급히 거두었다. 이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아니요, 그냥."
그녀는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었는데......
창문 밖으로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