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굽는 시간

2. 멈춘 시계탑

by 양송이

2. 멈춘 시계탑


서연은 강아지를 따라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강아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서연을 살폈다. 비가 온 뒤 촉촉해진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부드러웠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조용한 속삭임을 남겼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갔을까. 문득 시야가 트이더니, 오래된 나무 간판이 걸린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달오름 마을]. 서연은 천천히 나무 간판을 읽어 내려갔다. 흰 강아지 덕분인 걸까. 어쩌다 보니 원래 그녀가 향하려고 했던 마을에 도착했다.


나무 간판을 지나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상했다. 마을에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마치 무언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벽을 통과한 듯한 기분이었다.


서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한 느낌.


서울에서는 벗어날 수 없던 빌딩의 그림자와 인공적인 소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골목길은 평온했고, 낮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위로 길게 뻗어 있고, 집집마다 커다란 과일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거리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도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이런 깊은 산골 마을에 빈가게가 많은 건 이상한 일도 아니지.'


몇몇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서연은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 어딘가 낯이 익은 듯했다. 서연은 무의식적으로 팔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11:50.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산 시간이 한 시였는데 시계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시간이 맞지 않았다. 휴대폰도 꺼져버려서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서연은 천천히 걸었다. 마을 한가운데의 광장에 다다랐을 때, 멈춰 선 발밑에서 낯선 감각이 전해졌다. 광장의 중앙에는 낡은 시계탑이 있었다. 아니, 단순히 '낡았다'라고 표현하기엔 어딘가 섬뜩한 정도로 오래된 것 같았다. 숫자가 드문드문 지워진 문자반, 녹슨 시곗바늘, 금이 간 유리창... 서연은 시계탑의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 50분.


바늘은 그 시간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듯 보였다.


"당신, 누구야?"


갑자기 들린 낯선 목소리에 서연이 뒤를 돌아봤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한 윤기가 도는 어두운 갈색의 머리카락, 차가워 보이지만 깊고 차분한 눈빛, 그리고 흙먼지가 살짝 묻은 셔츠 소매를 무심히 걷어붙인 손목까지.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말을 걸어온 그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냐고."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


서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에요."


서연의 대답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는 서연을 한 번 더 가만히 훑어보며 말했다.


"이 마을에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어."


이 마을에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다니. 서연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저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숲길을 걷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남자는 서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거짓을 가려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서연은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남자는 그리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는 듯했다. 하긴 이런 산골 깊은 곳에 있는 마을에 우연히 왔다는 건 서연이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듯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 네."


남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시계탑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 순간 서연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전율이 흘렸다. 정말 오면 안 되는 곳에 와버린 걸까?


"... 네?"


"이 마을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서연은 도무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 걸까.


남자는 머뭇거리며 서 있는 서연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렸다.


"백구 때문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서연이 되물었다.


"백구요?"


남자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남자의 손가락 끝에는 서연을 마을로 안내한 강아지가 있었다. 백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을을 구경하는 동안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은 듯했다.


"저 개가 너를 데려온 거라면..."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는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일단 따라와."


"네?"


"오늘 쉴 곳이 필요할 거야."


서연은 초면에 자꾸 반말을 하는 남자가 재수 없었지만, 딱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남자를 따라나섰다.


서연은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마을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멀리 지나다니는 몇몇 사람을 빼고는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간간이 열린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커튼이 보이긴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연이 발걸음을 멈추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긴 원래 이렇게 조용한가요?"


남자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 마을사람들은 낯선 걸 좋아하지 않아."


"..."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이 왜인지 섬뜩하게 들렸다. 서연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이상한 곳에 오게 된 걸까?'


앞서 걸어가던 남자가 주황색 대문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띵동'


벨을 누르자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머리는 온통 하얀 백발이었지만, 불그스레한 홍조를 띤 얼굴은 소녀처럼 맑고 고왔다.


"할머니, 방 있어요?"


남자가 물었다.


"그럼. 있다마다. 기다리고 있었네."


황 씨 할머니가 3층의 방을 내어주었다. 방에 들어선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려놓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 마을에는 온통 낮은 건물들뿐이어서,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그런 서연을 보며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속삭였다.


"정말... 다시 돌아와 주었구나."


하루종일 운전을 해서 피곤했던 서연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피곤한 탓인지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에 들고 꿈을 꾸었다. 희미한 안갯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야 해. 네가 있어야만 시간이 다시 흐를 수 있어."


서연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따라갔지만 끝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어젯밤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그녀였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시계를 찾아봤지만 방 안에 시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연은 멀리 광장의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광장의 시계는 여전히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참, 시계가 고장 났다고 했었지.'


간밤에 꿈을 꾸긴 했지만, 이렇게 푹 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서연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다.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산책을 할 겸 문을 나섰다.


턱.


무언가 문에 걸려서 보니 어제 봤던 강아지가 앉아있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강아지는 서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치 '따라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연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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