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논란 정리
반갑습니다, 여러분. 사적인모임 에디터 조史자입니다.
최근 조금은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정교과서의 도입을 연기한다는 사실이죠. 국정교과서는 2015년 집행여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핫이슈였는데요.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사용해야하는 교사들과 학생들, 일반 시민들까지 크게 반발했고,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높아지면서 국정교과서는 더욱 큰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교육부는 지난 27일, 내년부터 사용하기로 했었던 국정교과서의 시행시기를 1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내년에는 시범학교를 중심으로 시행하면서 국·검정교과서를 혼용하는 형태로 가다가 2018년에는 전면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그간 강경했던 태도에 비해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이니 일단은 시간을 좀 벌었지만, 완전 철회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국정 교과서의 문제점을 귀에 딱지 앉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지 못하신 듯한 그 분을 위하여 지금은 만나뵐 수 없는 한 세기 전의 귀인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
여러분들 모두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가 역사를 정의하면서 그의 저서인 『역사란 무엇인가』(1961)의 제1장 마지막에 남긴 명언이죠. 꽤 유명세를 탄 사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카가 역사학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는 역사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특별연구원, 영국 외교부 근무, 런던 타임즈 근무 등 화려한 경력과 학식을 갖추었지만, 사학과 교수직이나 역사 관련 학술단체에서의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적극적인 역사의식은 많은 학자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지금까지 사학전공생이나 역사 입문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읽는 책인데...아마 국정교과서 집행하시는 분들은 아직 못 읽으신 것 같아, 제가 바쁘신 그들을 위해 카의 논의를 한번 준비해 보았습니다. 화장실 갈 때 보시길!
카의 역사의식 이전, 역사학에 대한 논의는 주로 랑케사학자들과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이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랑케 사학자들은 역사가 과거의 사실과 다름이 없어야 하며 객관적 사실만을 서술해야한다는 역사의식을 주장했고, 반대편에서는 역사가가 아무리 중립적이고자 하더라도 사실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재해석하는 과정 내내 자신의 경험과 인식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이를 비판했습니다. 이때 카는 이 둘을 화해시키기 위한 중재자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는 사료에 대한 객관적 검증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가의 선택에 의한 필연적인 주관성 또한 인정했습니다.
카의 논의는 재미있게도 ‘사실’의 구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에겐 그냥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어 하나를 카는 무려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1. 과거에 대한 사실 (a fact about the past)
2. 역사상의 사실 (a fact of history)
3. 역사적 사실 (a historical fact)
1. 과거에 대한 사실 – a fact about the past
먼저 ‘과거에 대한 사실’은 단순한 과거사실과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과거는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이 전쟁기에 한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과거의 경험은 과거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과거의 경험이 기록으로 언급되는 순간, 이것은 ‘과거에 대한 사실’이 됩니다. 이때 언급된 기록물을 사료라고 볼 수 있겠죠. 사료가 전해주는 사실은 과거 사실 자체를 기록이 전해주는 사실입니다. 즉 ‘과거에 대한 사실’은 과거 사실이 사료를 매개로 간접적으로 전해진 사실을 말합니다.
2. 역사상의 사실 – a fact of history
두 번째로 '역사상의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이 덧씌워진 ‘과거에 대한 사실’을 말합니다. 과거 사실이 기록됨으로써 ‘과거에 대한 사실’이 되었다면, 그것이 역사적으로 비추어볼 만한 사실인가에 대해 역사가가 선택하여 해석한 사실이 ‘역사상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료들이 존재하지만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어야만 ‘역사상의 사실’이 될 수 있고, 재해석된 이후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3. 역사적 사실 – a historical fact
세 번째로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상의 사실’이 그 중요도에 있어서 한 단계 승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의 동일한 개념이긴 하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고 끊임없이 재해석된 경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장군들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만이 세종로에 놓여있죠. 이순신 장군 이야기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그에 대한 사료를 선택한 최초의 역사학자 이후에 다른 학자들에게도 계속 선택되고 해석되면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만나는 역사적 사실들이 과거의 많은 이야기들 중에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역사가의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집어 들 때,
최초의 관심은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역사가가 어떤 중요성을 부여했는지, 왜 중요성을 부여하려고 했는지,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들의 저서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카의 교훈에 따라서 국정교과서의 집필진을 살펴볼까요?
국정교과서 집필진에는 보수성향인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있습니다. 특히 현대사 분야는 뉴라이트 계열의 보수성향 전문가들이 모여있고, 정치학자와 경제학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분야에 현대사 전공 역사학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친일미화문제, 독재정권미화문제 등으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분야인데도 말입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함으로써 다양한 관점을 바탕으로 한 역사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현대사를 집필하는 데에 있어서 현대사 전공자의 부재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집필진의 성격이 상당히 우편향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국정교과서는 우편향된 교과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현대사 분야에서는 말이죠. 교육부의 주장대로 국정교과서가 균형잡힌 역사인식을 위해서라면 기본적인 상식으로는 현직 역사학자는 있었어야 합니다. 또한 집필진 중 11명이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정부 소속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현 정부의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입니다.
앞서 말한 카의 입장에서 역사가의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카는 한편으로 역사가의 지나친 역할을 경계하며 역사의 객관성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것이 모두 인정된다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각각의 입장에서 모두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똑같이 옳은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카는 따라서 과거 사실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역사가의 한계와 임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는 현재에 살고, 과거 사실은 과거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료로만 그것을 접하는 역사가가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소거한 채’ 이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친 주관성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서술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 사실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관점은 변할 수 있어도 사실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에 살고 있는 역사가는 그것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이를 사료와 역사가의 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대화의 과정 동안 역사가는 다양한 사료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수정하고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단순 사실을 역사로 승격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만큼, 역사가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심사숙고하여 서술해야 합니다. 잘못 인용된 것은 없는지, 다른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할 부분은 아닌지 등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카의 교훈에 따라, 우리의 국정교과서는 얼마나 심사숙고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까요?
많이 살펴볼 것도 없이, 기사를 통해 밝혀진 기초사실에 대한 오류만 해도 상당합니다. 심지어 집필진이 1차 사료를 임의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 소련군의 태평양 함대가 연해주에서 동해를 통해 함북으로 상륙 -> 만주를 거쳐 남하했다고 기술.
- 5·16 군사정변 주도세력의 혁명공약 내 ‘반공 태세’를 ‘반공 체제’로 임의 수정.
-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스탈린이 지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로 표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역사 서술에서는 단어 사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어 선택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고, 그에 따라 평가의 방향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4.19 혁명, 4.19 민주화 항쟁, 다 비슷한 것 같지만 혁명은 기존 사회 구조나 정치체제가 완전히 전복되었을 때 쓸 수 있는 단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학에서의 용어 선택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책에서 용어에 대한 기초적 오류가 넘쳐난다는 것은 역사서술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다못해 대학생들도 레포트 낼 때 몇 번씩 검사하는데, 솔직히 어디 나가서 말하기 쪽팔립....읍읍...!
2016년 대한민국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국정교과서, 카가 보았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역사는 절대적 사실의 암기를 위한 과목이 아닌, 사료를 근거로 다양한 관점에서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지식 암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화와 역사 인식은
역사의 과잉이 낳은 역사의 빈곤에 처해있다.
조지형, 역사학자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비판적 의식을 원천봉쇄해버리는 국정교과서의 시행은 오히려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왜곡하고, 비판과 질문하는 방법을 잊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과거를 거울삼아 교훈을 준다고 했던가요, 이제는 카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국정교과서 시행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단행본
조지형, 『랑케&카,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김영사, 2006
Carr, Edward Hallett, 『역사란 무엇인가』, 육문사, 2011
허승일,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대출판부, 2009
국문논문
김헌기, 「봉쇄의 담론으로서의 역사주의 비판 : 랑케의 역사담론을 중심으로 = A Critique of Ranke's Historical Discourse and Historicism」,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노명환, 「역사연구와 기록관리 상호 관계의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 본 역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 랑케의 역사주의와 실증사학에 대한 본질주의(Essentialism)와 구성주의(Constructivism)시각의 검토와 함께, 『역사문화연구』, 제41호, 2012
참고기사
http://www.vop.co.kr/A00001094011.html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1222_0014598186&cID=10201&pID=1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