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k.a '현모양처' / 에디터 조史자
안녕하세요, 에디터 조史자입니다. 오늘은 바로 답사특집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여성 위인, 신사임당에 관한 역사학계 내의 흥미로운 논의를 가져 왔습니다.
史적인모임은 저번 주말, 강릉으로 답사를 다녀왔는데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인 오죽헌과 그녀의 작품을 직접 만나고 왔습니다.
또 최근 신사임당 담론 연구자분들이 내신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과, 많은 논문을 가지고 준비했으니 즐겁게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답사특집호는 총 3부작으로 진행되며, 4일 간격으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신사임당(1504~1551)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위인입니다. 글과 그림에 뛰어난 인물인 동시에, 훌륭한 어머니의 상징인 그녀는 2008년 여성 최초로 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려 이영애씨가 연기하는 신사임당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방영된다고 하는군요! (제 지갑에서는 만나 뵐 수 없었으니 이제 티비로 볼 수 있겠어요...)
실제로 신사임당은 21세기인 지금뿐만 아니라 16세기, 17세기를 넘어 20세기까지 시기마다 HOT한 인물이었습니다. 대체 신사임당의 매력이 뭐길래, 500년 동안이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또 그렇다면, 많고 많은 어머니들 중에 왜 하필 그녀였을까요?
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 태어나 1548년 44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작품을 남긴 화가이면서, 글재주까지 겸비한 능력자였습니다. 또 조선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부각되었기 때문에 신사임당은 오늘 날 훌륭한 어머니라는 상징적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처음부터 어머니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16세기 지식인들에게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와는 무관하게, 능력 있는 화가였습니다. 소세양, 정사룡, 어숙권은 사임당의 산수도를 이야기하면서 세종 시기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 다음 가는 화가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사료1>
“지금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評휴謂亞於安堅)이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리오."
어숙권(魚叔报) 「稗官雜記」4. 『大東野乘』
위 기록은 어숙권이 그녀의 포도와 산수도를 칭송하며 남긴 기록입니다. 이렇게 화가로서 기억되던 그녀가, 모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칭송되기 시작한 것은 100년이 흐른 후인 17세기, ‘송시열’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서인(西人)계열의 문사로,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주요 인물 중 한명인데요,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이 시기에 대한 간략한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죠.
17세기는 그 유명한 붕당정치의 시대였습니다. 16세기 중엽 이후 사림(士林)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 이후 붕당을 이루었던 성리학 중심 세력)이 정국을 주도해나가면서 이들은 점차 각자의 학풍 및 이념에 따라 여러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서인’은 이이의 학풍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광해군 때 국정을 주도하던 ‘북인’과의 대립에서 승리하고 광해군을 폐위, 인조반정(1623)을 성공시키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후 현종 때에는 왕실의 예복문제를 놓고 이황의 지지 세력이었던 ‘남인’과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붕당 간의 세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각 붕당이 계승하는 학풍에 대한 정당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정치적 ‘힘’과 그에 합당한 권위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은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는 율곡 이이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송시열은 율곡 이이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근원인 어머니에서부터 그 정통성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그림은 신사임당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사료2>
“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五行)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송시열(宋時烈), 「師住堂畵蘭跋」, 『宋子大全』
이 사료는 송시열이 1659년(효종10) 남긴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가 신사임당의 작품을 ‘사람의 힘이 아닌 천지의 기운이 담긴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사임당은 자연의 조화로운 기운으로 그림을 그리는 특별한 인물임으로, 그녀에게서 난 율곡 이이 또한 천지의 기운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죠. 송시열을 시작으로 신사임당의 그림은 율곡 존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율곡 이이는 날 때부터 특별한, 천지가 낳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송시열의 기록 2년 후, 동시대의 다른 학자도 송시열과 비슷한 맥락의 평가를 남기는데요.
<사료3>
"삼가 신부인의 산수 그림을 열람해보니 …… 이것은 어찌 배워서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거의 하늘이 주어 얻은 것이리라.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신 것도 역시 하늘이 준 것이요.
천지의 기운이 쌓여 어진 이를 밴 것도 바로 그 이치이니 어찌 조화가 손 안에만 있다 할 것인가?
기이하고도 아름답도다.”
백헌 이경석(李景奭), 「申夫人山水圖序」,『白軒集』
「신사임당의 산수도에 대한 발문」 중, 1661(현종2)
신사임당의 산수도를 하늘의 것이라고 평가, 율곡의 태생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등 화가 신씨가 아닌 ‘율곡을 낳은 신사임당’ 이야기가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의 학자들은 유교윤리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정치판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송시열도 마찬가지였구요. 이런 송시열에게 한 가지 불편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신사임당의 대표작 산수도였습니다.
사실 이전에 16세기 지식인들에 의해 주목받은 신씨의 대표작은 산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보여드렸던 이경석의 발문(사료3) 또한 산수도에 기록된 것이었죠. 이경석의 발문 15년 후인 1676년(숙종2)에 송시열은 같은 그림에 발문을 요청 받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깁니다.
<사료4>
"…… 이 족자는 그림을 전공하는 화가의 규모와 같고 한때 우연히 장난삼아 그린 그림 같지는 않습니다. 즉 당시 어버이의 엄격한 명령으로 억지로 그린 그림 치고는 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 그리고 남녀의 구별이 지극히 엄격해서 비록 일가친척이라도 무슨 물건을 서로 빌리기나 한 우물을 같이 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인의 인장 아래에 소공이 자기 손으로 그 위에 시를 적어 놓은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따라 잡기 어렵다“는 것은 남녀간의 엄격하고 경의해야 하는 점에서 본다면 부당한 말인 것 같습니다. 소공의 사람됨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그 무례하고 공손치 못한 것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 이 그림이 과연 부인의 손에서 나왔고 또 소공이 시를 쓴 것도 어떤 곡절이 있었다고 해도 위에서 말한 바처럼 나의 좁은 마음에는 편안치 않은 것 입니다. ……"
송시열(宋時烈), 「師任堂山水圖跋」,『家傅書帖』중에서
송시열이 발문을 요청받은 산수도에는 16세기 소세양이 적어 넣은 발문과 15년 전 이경석의 발문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은 이 그림에 대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심지어는 그림의 진위여부를 의심하고 있군요. 송시열의 이러한 비판적 태도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산수도가 여자가 그린 것 치고는 너무나 뛰어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림을 전공하는 화가의 것 같다.’라는 말에서 송시열은 이 그림이 신씨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합니다. 산수도가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신씨가 그린 것인 경우, 그녀가 여자의 본래 임무를 벗어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료2에서 송시열 자신이 그녀의 난초 그림을 칭송할 때와는 말이 다르네요. 하늘의 능력인 것 같다면서요...ㅎ
2. 두 번째로는 소세양의 발문 때문입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외간남자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 남자가 직접 발문을 적어 넣었다는 것은 굉장히 낯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남녀가 유별해야 하는데 어디 감히...! 이런 생각이었던 것이죠.
3. 세 번째로는 산수도를 그리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들 때문입니다. 보통 산수도는 자연 절경을 담기 때문에 화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이 산수도가 신씨의 것이라면 그녀 또한 여자의 몸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닌 셈이 될 것이고, 송시열에게 이는 부정하고 싶은 사실일 것입니다.
송시열은 전적으로 유교윤리에 기반하여 인물의 일생을 판단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녀의 행적이 유교적 윤리를 기준으로 했을 때 흠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율곡 이이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때 산수도는 송시열의 입장에서 신사임당의 성스러움에 흠을 낼 수 있을만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이 산수도가 그녀의 것이 아니길 바란 듯 보입니다. 송시열의 이러한 평가 이후 산수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비운의 그림이 됩니다.
송시열 이후 그의 문인들은 신사임당에 대한 송시열의 담론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송시열이 아니꼬워했던 산수도는 제껴두고, (원본이 없었다는 점도 한 이유입니다.) 그녀의 새로운 그림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지금 오만원 권에서 볼 수 있는 초충도입니다.
<사료5>
"…… 이른바 여자의 일이란 베 짜고 길쌈하는 데 그칠 뿐, 그림 그리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인의 기예가 이와 같은 것은 어찌 여자 교육을 등한시 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여 여기에까지 온 것이리라. …… 시도 부인이 할 일은 아니지만 『시경』에 있는 「갈담(葛覃)」, 「권이(卷耳)」 같은 것은 저 거룩한 부인(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 지은 것이다.…… 또 여자가 지은 것으로 「초충(草蟲)」편이 있는데, 이 그림이 바로 그것을 그려낸 것이니……"
죽천 김진규(金鎭圭), 「題思住堂草虫圖後」, 『竹泉集』, 卷六
이 사료는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기록 「초충도에 대한 발문」 일부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신사임당의 뛰어난 그림이 가능했던 것이 여자의 일을 제쳐두고 그림만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천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그림을 평가할 때 우려했던 부분을 해결해 준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신사임당을 유교 윤리에 더욱 적합한 인물로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보입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유교 경전인 『시경』의 「초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죠. (실제로 신사임당이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성이 그린 그림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유교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내는 수단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신사임당은 고대 성모들의 가르침을 잇는 동시에, 유교윤리에 완전히 적합한 인물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료를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죠.
<사료6>
"그린 이는 석담 이 선생의 어머니요. 얻은 이는 동래 사람 정종지라네.
선생을 공경함이 부인께도 미치어 그림을 만지다가 나도 몰래 경탄하네.
상상컨대 고이 앉아 종이 위에 붓 던질 때, 그림을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갈담」과 「권이」에서 읊은 것을 본떠서 그려내니 소리 없는 시로구나."
서암 신정하(申靖夏) 「사임당초충도가(師任堂草蟲圖歌)」, 1711년(숙종 37)
이는 「사임당초충도가」의 일부인데요, 이제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록되고 있으며, 앞서 김진규가 말한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유교 경전의 초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완전히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대표작으로 손꼽히던 그녀의 산수도는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지고 초충도가 완전한 신사임당의 대표작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의 제자들은 송시열이 가려워했던 부분을 긁어주는 동시에, 제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렇게 17세기 시작된 신사임당 담론은 ‘신사임당은 ~ 였을 거야!’에서 ‘신사임당은 ~였어.’, 그리고는, ‘역시 신사임당은 유교경전에 뛰어나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 훌륭한 여성!!! 과연 율곡의 어머니시다!!!!!’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정체성이 어떠했는지 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이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날까지 계속해서 선택되고, 재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는, 우리가 만나는 신사임당은 결국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신사임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의 논의는 여기까지입니다. 2편에서는 에디터 소.소와 함께 근대화시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신사임당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20000^^
(신사임당 시리즈는 총 3편으로, 4일 간격으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연희, 이경구, 이숙인, 홍양희, 김수진,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다산기획, 2016
국문논문
박지현, 「화가에서 어머니로 : 신사임당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 『동양한문학연구』, 제 25호, 2007
홍양희,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당」, 『史學硏究』, 제 122호, 2016
이숙인, 「신사임당 담론의 계보학(1)」, 『진단학보』, 제 106호, 2008
조규희, 「만들어진 명작: 신사임당과 초충도(草蟲圖)」,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12호, 2013
박민자, 「신사임당 탄신 50주년 기념논문 : 신사임당에 대한 여성사회학적 조명」, 『밤나무골이야기』, 제17호, 2005
이은혜, 「조선시대 강릉지방의 여류 문학 -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중심으로」, 『나랏말쌈』, 제18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