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란 나이가 그토록 좋은 이유
서른이 되고 나서 자주 느끼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이제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생겼네'하는 생각과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이 갈수록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서른이 되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올해 여름까지는 솔직히 말하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쌀쌀해진 가을을 지나 초겨울이 불쑥 찾아온 지금도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길어진 코로나 탓에 새로운 사람들을 못 만난 이유도 있겠지만, 서른이 되었다고 해서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건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 상반기에 내가 다짐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명 ‘서른 살의 기록’ 프로젝트!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 만큼 서른 살이 된 기념으로 무엇을 하면 가장 의미가 있을까 연초에 생각하다가 이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생각들을 모두 놓치지 말고 올해 안에 꼭 글로 남겨봐야지 한 다짐이었다. 어쩌면 이게 ‘앞으로 하고 싶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버킷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차게 다짐한 연초의 시간들이 참 무색해지게도 나는 올해 꽤 오랜 시간 이른바 ‘글태기’에 빠져버렸다. 특별한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너무나도 무난하고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는 나의 서른 살에 대해 당장에 쓸 이야기가 마구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셀프 프로젝트를 처음 기획했을 당시에는 ‘분명 엄청난 감정들이 있을 거야!’하는 확신에 찼었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에 그저 적지 않게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쩌면 마흔이 되어서도 크게 다를 것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서른의 여유
그래도 이십 대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딱 하나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한 ‘여유’가 생겼단 사실이다. 이십 대의 내가 열심히 살아낸 덕이라고 해야 할까. 그 덕에 참 운이 좋게도 나는 지금의 ‘여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퇴근 후, 좋아하는 유튜브 음악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캔들에 촛불을 켜놓고, 마음에 드는 책 속 구절을 새로 산 아이패드 메모장에 하나씩 필사하며 보내는 시간적 여유. 그리고 밖에서 시간 보내기 좋아하는 나지만, 조용히 앉아서 하는 취미도 한 번 가져볼 겸 아이패드 드로잉 강의도 틈틈이 챙겨 보는 그런 여유 말이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이 일상 속에 생기면 가장 좋은 점은 내 마음속 공간도 그만큼 여유 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팽팽하게만 느껴졌던 몇 가지 인간관계의 여러 선들이 내 안의 공간이 점점 넓어질수록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느슨해진 선들에 더 이상 신경이 가지 않을 때 비로소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선들만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아졌으며, 그 시간 속에 나는 그 어떤 시간보다도 가장 마음이 편했고, 큰 행복을 느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삼십 대의 시간들은 나에게 편안함과 행복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사람들과의 긴 여정이지 않을까?’ 지나간 나의 흑역사를 모두 알고 있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몇 남지 않은 진짜 내 사람들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들에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어쩌다 서른, 어쩌다 6년 차 직장인
어느덧 벌써 6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2016년 7월에 입사했으니깐 벌써 5년 3개월을 꽉 채운 것이다. 그것도 한 회사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문득 스무 살 초반의 인턴 시절이 떠오른다. 아마 22살 여름이었을 것이다. 학기 도중, 여름 인턴쉽으로 너무 가고 싶었던 한 유명 항공사에서 뉴욕 인턴 생활을 할 때였다. 당시 뉴욕에선 두 번째 인턴 생활이었지만 그때는 항공사 취업을 꿈꾸던 때라 훨씬 더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던 그림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또 한 번 직장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깨졌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아, 나는 회사 다니면 안 되나 봐. 다들 어떻게 다니고 있지?’ 하는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아빠, 나 대학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하며 당차게 외쳤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만으로 5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니!
운이 좋게도 난 지난 5년간 좋은 상사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목표들이 생겼으며, 생각지도 못한 기회들이 개인적으로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빠가 대학원은 정말 공부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가는 거라고, 우선 사회에서 경험을 먼저 하고 나서 그 이후에 생각해도 된다고 하신 말씀을 듣길 참 잘한 것 같다. 이래서 옛날부터 부모님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이 생겼나? 아무튼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모두 지나 어쩌다 된 서른에서야 비로소 찾아온 ‘마음의 여유’는 정말이지 너무 좋다. 한편으로는 서른 살만 계속 반복하면서 살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 이렇게만 보면 나는 지금 서른을 꽤나 즐기고 있는 듯 보이겠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마음속 상자들이 몇 개 있다. 평생 함께 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는 행운이 나에게 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하나이며, 설령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고 난 그 이후의 삶은 또 다른 난제이다. ‘내가 어떻게 키운 커리어인데 이게 중간에 끊기면 너무 슬픈데?’하는 답도 없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이어지는 생각들에 종종 빠지게 된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마치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잘 익은 감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주변의 덜 익은 다른 감들보다는 훨씬 여유도 있고 색깔도 붉게 물들어서 예뻐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무게에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항상 내재되어 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이란 나이가 좋은 이유는 적당한 불안함이 주는 특별한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 종종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멋진 인생의 기회들은 이런 불안함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설렘을 가져다준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나에게 펼쳐질까 상상할 때면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다.
어쩌면 앞으로 나에게 펼쳐질 삼십 대의 시간들은 이런 불안함과 설렘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적이 있다. ‘20대로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딱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오로지 내 머릿속엔 ‘다시 그 배움과 익힘의 과정을 반복하라고? 절대 안 돼!’란 생각뿐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그저 지금 잘 익은 내 나이 서른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 익어가야지. 잘 익은 감은 떨어져도 맛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