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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Apr 07. 2021

다름을 허락해 주세요

차이, 차별 그리고 혐오


'우리는 다르지만 모두 같아요'


거실을 청소하다가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캠페인 배지를 발견했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는데 배지를 버리려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말을 우리 어른들이 가르칠 자격이 될까 해서였다. 우리 사회가 나와 다른 모양의 사랑, 외모, 환경, 가족의 사람들을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들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사회 명제이다. 한데 다수인 우리가 그들을 우리 선 안으로 끌어안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사람들일까. 아이들에게 알려줄 사회와 확실하게 거리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가끔 이렇게 아이들이 현실과 괴리감 있는 것을 사회라 배우는 모습을 볼 때 나는 혼란스럽다..


" 엄마 서로 다른건 틀린거였어? "


나는 이 유치원 배지 문구를 접하기 전 안 그래도 최근 트랜스젠더였던 변 하사의 사망으로 다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 중이었다. 극단적 선택을 했던 고인은 여전히 게시판에서만큼은 살아있을 적 만큼의 모욕을 받고 있었고 그에게 애도와 명복 따위는 허락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다. 이 정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왜일까. 글을 쓴 사람들은 '얼마나 특별한 이유들로' 그를 우리와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것일까. 맞다. 고인은 우리와 아주 다르다. 하지만 우리 또한 어릴 적부터 까만색 크레파스도 크레파스요, 살 색깔 크레파스도 같은 크레파스라고 배우며 자라지 않았나. 우리 사회가 그들을 우리로 끌어안는 일은 내 생각에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나는 우리 아이가 나에게 다른 것은 틀린 것이었냐는 물음을 한다면 요 몇 년간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 확실해져 버렸다.



우리는 그냥 운이 좋았던 다수

나와 다른 이들에게 짙게 깔려져 있는 선입견과 편견들을 모두 제치고 그들을 우리처럼 단번에 대하는 일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틀리지는 않았다. 틀린 규정도 다수인 우리가 정한 기준임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틀렸다는 말도 된다. 다수인 우리는 순전히 운이 좋아 다수가 되었다. 나는 운 좋게 남자를 좋아하고, 운 좋게 장애가 없으며, 운 좋게 대한민국 원주민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거주 중이다. 내가 원해서 다수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소수도 그들이 소수이길 원해서 된 것이 아님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다면 소수자의 차이를 두고 다수의 힘으로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또 다수자는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장애인의 80%는 장애가 '있던' 사람들이 아닌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가 '생긴'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우리는 새롭게 바뀌는 환경과 우리 스스로 로 인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소수자가 될 예정인 것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어 내 가족, 지인들에게 꽂힐 생각을 해보자. 그때도 이들을 거부할 것 인가.



어떻게든 틀리다고 하고 싶어 한다

몇 년 전 부터 대한민국에는 특정 사람들을 프레임을 걸어 혐오하는 감정들이 늘어나고 있다. 혐오는 어떤 집단이나 사람을 떠올렸을 때 싫다, 틀렸다 감정이 먼저 표현되고 이유는 나중에 찾아서 갖다 붙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들을 싫어한다는 감정은 어떤 이유를 근거로 들어 결론으로서 마지막에 도출됨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또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혐오의 이유를 찾을 때 도덕적인 이유를 찾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유는 그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성병이 돌 수 있어서 모두에게 위험한 이유를 들고, 맘충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만 신경 쓰느라 모두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식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이 찐 사람, 여성, 기독교인, 세월호 희생자 및 유가족 등을 혐오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 구별 짓기는 지배의 한 방식이다. 기득권은 다르다는 이유로 경계선을 긋고 차이에 가치를 매긴다. 우리를 그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야 자원 독점, 지위 획득, 위험 회피와 같은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 집단을 더럽고 열등하며 병리적인 존재,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으면 우리 집단의 이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

 차별과 배제는 지금 대한민국이 유례없는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책들은 입을 모은다. 대인관계 걱정, 학업과 취업 불안, 주거와 안정의 문제, 사회적인 안전망 부재로 인한 초개인 주의로의 변화까지 불안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하는 중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과 나를 배제시켜야 하거나 다수가 낙인찍어 놓은 소수에게 가서 다수와 함께 그들을 밀어내야 불안을 떨쳐낼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도덕적인 이유를 드는 것이 어느 집단을 배제시키는데에 가장 마음이 덜 아픈 쪽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당하는 사람들이 '틀린' 그 이유들이 정말 치명적인지, 얼마나 팩트인지, 나나 우리 이웃이 그들이 될 일은 없는지에 대해서는 왜 관심이 없을까. 따지고 보면 평범한 나에게도 혐오 프레임이 몇 개 해당된다. 김치녀, 맘충, 진지충 정도가 되겠다. 운 좋아 다수였다는 나에게도 차이로 타겟이 되는 경우가 오는 것이다. 혐오는 뒷일은 생각 안하고 지금의 불안만을 해소하고자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관련이 깊고 대한민국이 병들었다는 의미이며 불안시대의 고위험징후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며 안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혐오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다.

나조차도 특정 집단에 대해 이야기 들었을 때 손사래부터 쳤던 집단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또 변 하사 사망 이전에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기회에 고인에게 쏟아지는 많은 인신공격과 조롱의 게시판 사이에서 싫음의 수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보통과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도 잘못된 일인 건지, 난 얼마나 보통인인건지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우리 딸 아이가 학교에서 배워왔다며 내 앞에서 불러준 노래가 생각난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혐오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그들 또한 꽃임을 인정하는 것이 혐오의 반대다. 꽃잎이 보통과 달라도, 색깔이 흔하지 않아도, 타지에서 날아와 여기에서 피워냈어도 이들은 모두 꽃이다. 틀린 꽃들을 다른 꽃들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이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모두의 합의와 이해의 과정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에게 틀린 사람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만 있다고 당연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길, 우리 아이앞에서 거짓말쟁이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참고 도서-불안한 사냥꾼의 사회(석승혜, 김남옥)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제러미 월드론)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무엇이 문제인가

                 (홍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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