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시절 인연이라 하는 건가요?

by 블레스미

3월이 되면서

완전한 봄을 맞이했다.




이곳저곳에

이름 모를 알록달록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검게 죽어 있던 나무들은

푸른 풍성함을 내 보이면서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살랑살랑 부는 따뜻한 바람은

내 머리칼을

사뿐사뿐 춤추게 만들었고

어디에선가 피어오른

몰랑몰랑한 봄냄새가

내 몸속의 퀴퀴함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봄이 온 세상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미국에 남기로 결정을 하면서

여러 가지 준비들로

몸은 바빴지만

마음은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짐을 던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이어나갔고

남편도

새로운 업무부담 없이

익숙함을 이어나가게 되니

그들로부터 느껴지는 안정감이

나를 평화롭게 하더라.




어느 주말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 잠시 서 있었는데

살짝 열어 놓은 창문뜸으로

봄바람이 들어왔다.




손을 뻗어

봄바람을 어루만지니

그래 이거면 됐지 뭐 별거 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그러네, 좋네' 라며

받아치던 남편.




그때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딱 그 한마디로

충분했던 거였다.




사모가 있는 그 땅에도

봄이 왔을까.




4월까지 눈이 내리는

그곳이지만

전무가 2주간 오기로 했다 하니

그 집엔

이른 봄이 찾아왔겠지.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카톡 메시지가 왔다.




열어보니

전무가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그동안 전무와 끈끈했던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전무의 신상에 관한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무는

함께 합을 잘 맞춰준 직원들에게

직접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게

도리라 생각한 거였다.




그 메시지 안에는

함께 해 준 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마지막까지

책임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담겨 있었고

그 안의 모든 이들은

서로의 건승을 빌며

응원을 하고 있었지.




그러다 3월 말쯤

사모에게 전활 했는데

받질 않으시더라.




그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별생각 없이 있었더랬지.




그러다 4월이 되었고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신호음이 아예 가질 않았다.

그냥 바로

음성메시지가 흘러나왔는데

번호를 다시 확인하라네.




뭐지?

낮잠에 방해 돼 꺼버리셨나?

배터리가 나가버렸나?




그렇게 다음날,

또 다음날 전활 해봤지만

여전히

같은 메시지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 순간




아...

핸드폰을 바꿨구나..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었네.




핸드폰이 고장 나서 바꾼 거라면

나에게 알려줬을 것이다.

내 번호를 외우지 못했다면

남편을 통해서라도

연락을 했겠지.




하지만

2월 말에 통화한 이후로

연락이 닿질 않았고

전해진 소식이 있지도 않았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화면 꺼진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나 하다가도

전화를 바꾼 게 아니라

고장이 난 건가 싶어

당황스러움은

걱정으로 변해갔었지.




집안일을 하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생각하다 보니

점점 이해가 되면서

이유를 알겠더라.




사모는

분명 의도적으로

핸드폰을 바꿨으리라.




큰 파도에 맞아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슬러

다시 일어난 사람이다.

제정신이라면

그 바다 앞에 다시 서 있겠나.

가능한 한

멀리멀리 떠나고 싶겠지.




목숨을 잃을 뻔 한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키지 않는 곳으로,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메마른 땅으로,

자신이 쓰러진 걸 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럴만하다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점점 변질되어 가더라.




'그럴만하지, 그럴 만 해'

하던 생각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래'가

되고 있었지.




알고 지낸 지가 4년이다.

그냥 알고만 지냈나?




눈물 콧물 흘려가며

서로 위로했던 시간들이었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던

시간들이었고

서로의 인간성을 확인하며

의리를 다지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나에게만 의미 있었던 거였나?

이렇게 한 순간에 뚝 끊어질

하찮은 거였나??




몇 날 며칠 그 생각뿐이었고

서운함과 배신감에

눈물이 비집고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니

제 풀에 꺾인 건지 뭔지

그래,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더니만

이렇게 인연을 끝내는 게

나에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모도

아마 나와 연락을 끊는 게

서로에게 좋겠단 생각을

했을 거라 본다.




둘이 이제 공통사도 없거니와

서로 얘길 해 봤자

나는 사모에게

그 망할 회사를

상기시킬 뿐일 테고

사모는 나에게

상처 난 과거를

상징할 뿐 일 테니.




내 생각은 도착점에 다 달았다.




그래,

인연을 유지하는 건

여기까지 하는 게 여러모로 맞아.

나 대신 결단을 내려줬으니

다행인 거야.




다만,

아직 내 마음은

따라오질 못하고

저만치 뒤처져 있었네.




왜냐.




나의 막장 드라마가

권선징악,

사필귀정일 줄 알았다.




결국

내 남편은 임원직에 오르고

전무는 이름을 떨치는 걸로.




그 빌런들,

또라이들, 미친년들은

주구장창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로.




그런데 그건

동화 속에나 있는 일인가 보다.




내 남편은

왕관을 눈앞에서 놓쳤고

전무는 고공낙하를 해야 했다.




반면에 그 떼거지들은

본인들이 위너라며

샴페인을 터트렸겠지.




그런 와중에 그래도

사모와 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며

정신승리라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자신들의 꿍꿍이로

잠시 연대했던 그들에게

'이것 봐라,

너희가 흔들어 대도

우리에겐 서로가 남았다' 라며.




하지만

정신승리마저도

할 수가 없다 생각하니

좌절감이 올라왔고

그 떼거지들이

자기네가 옳았고, 맞았고

그래서

이겼다고 외칠 걸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마구마구 끓어올랐다.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시간을 보내다

5월을 맞이했고

어느덧 그 날짜가 되었다.




사모가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그 날짜.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봤다.

역시나

잘못된 번호라는

자동응답..




난 카톡 창을 열어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봐 온

사모의 성격으로 짐작해 보자면

사모는 분명

예전 핸드폰을 함께 놓고

보고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연결만 안 되어 있을 뿐

계속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함께 한 4년의 시간을

압축하고 압축해

메시지 몇 줄에 담아 보냈다.




그 메시지는

한 동안 숫자 꼬리표를 달고

외롭게 서 있더니만

어느 날엔가 확인해 보니

주인을 찾아 간 듯

그 꼬리표가 떼어져 있더라.




읽으셨구나..




난 그걸로 됐다 싶었다.

내 마음과 마지막 인사가

잘 전달된 것으로

마무리는 지은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 메시지를 보고

어떤 표정이셨을지,

속으로 뭐라 답하셨을지

딱 상상되니 웃음이 났네.




그 후로 어찌어찌하여

전무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느 중견기업으로 들어가

대표이사가 되었더라.

진짜인가 싶어

회사 이름을 검색하니

전무의 이름이

대표이사로 딱 박혀있네.




이름만 봤을 뿐인데

왜 그리 반갑던지.

덩달아

사모 얼굴도 떠오르면서

이제 맘 편히 계신가 싶고.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다시 한번 찾아봤더랬는데

세상에나,

전무가

그 기업의 대표이사가 된 이후로

쭉쭉 성장세더라.




심지어 올해 매출은

작년의 200%가 넘었다는 기사.




역시

일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능력자다.




그런 능력자를 몰아낸 이 회사는

어떻게 됐냐고?




당연히 죽진 않았다.

내가 없어도 잘 만 돌아가는 게

회사라 하지 않나.

단,

대내외적으로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가 있었으면 기대됐을

신문기사와 영업이익이 있었는데

모두 다 사라졌고

그걸 되찾아 오겠다는 사람,

이어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직원들 사이에서

전무의 이름을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측근이 아니면

앞 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들에게 전무는

확실한 가해자일 수밖에 없었다.




좋지 못한 일에

휘말려 버린 사람이니

마치 금기어가 된 듯

그의 이름이

거론될 일이 생기면

피해 가고, 돌아가고,

얼버무리는 분위기.




그렇게

사모와 전무는

나의 일상에서

그리고 남편의 사회에서

점점 잊혀 갔고

마치 예전부터

우리만

존재했었다는 듯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사모도 그럴까?




내가 바라는 건

부디...




나의 존재가 부정은 아니길

우리의 시간이 검은색은 아니길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한숨은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