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대담하면서도 빈틈없는 사랑,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되 나쁜 것에 대해 눈감지 않는 사랑, 그리고 신성한 척 거룩한 척하지 않는 사랑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사랑을 하되 제대로 사랑할 것을 주문했다. 최고의 사랑, 가장 바람직한 사랑,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을 염두에 두고 애써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노력하면 누구나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최고의 사랑이란 서로 생명력을 주고받는 사랑이다. 이는 좋아하는 사람의 자아를 자기 자신의 자아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느끼는 사랑을 말한다. 상대방의 감정과 희망을 자기 자신의 그것처럼 이해하고, 자아 중심의 감정을 의식적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전개해 상대방과 함께 포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일방적으로 내어주거나 받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쁨과 쾌락을 공유하는 호혜적 사랑이어야 한다. 이런 사랑이라야 서로 크게 애쓰지 않고도 지속적으로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러셀은 한쪽이 다른 한쪽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는 사랑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쪽은 번영을 누리면서 흥미로운 존재가 되지만 상대방은 점점 창백해지고 우둔해지며 무력해지기 때문이란다. 러셀은 생명력을 주고받는 호혜적 사랑의 중요성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두 사람이 서로 진실되게 관심을 갖는 사랑, 상대방을 단순히 자기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결합체로 여기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이르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러셀은 받는 사랑은 반드시 베풀어야 할 사랑을 해방시켜야 한다면서 사랑을 통한 행복은 반드시 공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기쁨과 타인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적절히 결합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남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수반되지 않은 자신만의 기쁨은 잔인한 것이며, 반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없으면서 남의 행복을 비는 태도에서 생겨난 사랑은 쉽게 식어버린다고 진단했다.
그렇다. 사랑은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 생겨나 그런 수준으로 유지될 때 참된 생명력을 갖는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거나 받다가 쉽게 파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지쳐버릴 가능성이 있고, 일방적으로 그것을 받는 사람은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고귀하다는 사실에 너무 큰 가치를 두는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흔하게 발견한다.
러셀의 사랑론은 구체적이어서 좋다. 그는 가치 있는 사랑을 얻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저서 ‘행복의 정복’에 나오는 내용으로, 서두에 소개한 문장이 그것이다. 그가 종교적, 도덕적 규범이 엄격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꽤 오랫동안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랑의 기술’이다. 지금도 누구나 고개 끄덕일만한 내용이다.
러셀은 먼저 대담하고도 빈틈없는 사랑을 주문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사랑을 개척해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터부나 미신적인 공포, 비난하는 말들과 비아냥하는 침묵에 굴복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을 일궈나가는데 신중함은 절대 금물이라고도 했다. “온갖 종류의 신중한 태도 가운데 참된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신중함은 사랑에 대한 신중함이다.” 일단 특별한 빈틈이 없다고 판단되면 대담하게 밀고 나가라는 조언이다. 하긴 자신감이 충만해야 가능할 것이다.
러셀은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나쁜 것에 대해서는 눈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인생에서 좋고 나쁜 것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진실된 사랑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것을 드러내 기쁨을 공유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자 기본 효능에 속한다. 나쁜 것을 숨겨 눈감는 것은 사랑의 기초를 허무는 행위이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마지막으로 러셀은 신성한 척, 거룩한 척하는 사랑은 가치가 없다고 했다. 위선이 사랑을 이끌고 나갈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사랑은 본래 의미에선 신성하고도 거룩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가끔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다지 신성하거나 거룩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음에도 그런 척하는 것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러셀은 사랑을 행하면서 체면과 염치에 눌려 모든 것이 신성한 것처럼 포장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칭송받는 사랑에 굳이 신성함이나 거룩함을 부여하는 것은 성적(性的) 금기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사랑이 반드시 신성하거나 거룩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척하는’ 사랑보다는 세속적이거나 다소 저급하더라도 진솔한 사랑을 추구해야 행복하다는 생각 말이다.
인생에서 멋진 사랑을 일궜다고 해서 그것이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주변을 둘러보라, 기쁨에 한껏 겨워 살다가 갑자기 고통의 골짜기로 내려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최고의 사랑과 최악의 사랑을 번갈아 가며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노래한 이유 아닐까? “사랑이란 한숨으로 일으켜지는 연기. 맑은 날엔 애인의 눈 속에서 번쩍이는 불꽃, 흐린 날엔 애인의 눈물로 이룬 바다. 사랑이란 가장 분별 있는 미치광이요, 목을 졸라매는 쓰디쓴 약인가 하면, 활력 넘치게 하는 감로이기도 하네.”
그렇다. 모든 사랑은 위험과 고통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평화보다는 전쟁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이별은 기본이고, 질병이나 죽음까지 어른거린다. 어쩌면 세상에는 사랑에 성공한 덕분에 복된 인생을 사는 사람보다 사랑에 굶주리거나 지친 나머지 불행에 휩싸여 사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사랑의 이런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을까? 긴 세월,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천착했으며, 요즘에는 심리학자, 정신의학자들이 연구에 발 벋고 나섰다.
러셀은 사랑의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유’를 제시했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유롭고 너그러우며, 구속하거나 구속받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사랑에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육체와 정신이 동등한 비율로 결합되어야 한다. 사랑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는 나무여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을 구속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뿐만 아니라 말, 심지어 생각까지 간섭하려 든다. 배타적 사랑을 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관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랑에 균열이 생기게 하는 이기적 소유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말한다. “사랑에 소유욕이 침투하면 활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격을 잃게 된다. 소유욕이 없을 때라야 사랑은 인격을 완성하고 좀 더 밝은 세상을 살게 된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써 보장해줘야 하는 ‘자유’의 의미를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서 찾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심과 두려움을 버려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그의 혜안이 멋지고 부럽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러셀이 지적한 소유욕을 포함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크면 둘 사이에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상대방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특히 그렇다. 이런 경우 상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본인조차 심리적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언젠가 사랑이 식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상대방을 더욱 옥죄게 할 수 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지만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이런 걱정, 이런 두려움은 상대방에 대한 일상의 구속을 넘어 집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루빨리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방을 지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놓아줘야 본인도 자유로워진다. 상대방이 행복해야 본인도 행복해진다. 사랑에 관한 한 이는 분명한 진리에 속한다. 남녀 간은 물론 부모자녀 간,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다. 욕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현재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속대신 자유를 선택했음에도 사랑에 금이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에도 기존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월든’을 쓴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 답을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