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경쟁>
“인생에서 경쟁은 지나치게 냉혹하고 집요하며, 필요 이상으로 근육을 혹사시키고, 의지 또한 지나치게 집중하도록 만든다.”
인간사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경쟁이 아예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세상의 재화와 인간의 욕망 사이에 큰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지위, 돈, 명예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재화는 소량인데 반해 그것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정 많다.
경쟁은 부담과 긴장을 수반하기 때문에 대부분 피하고 싶어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측면이 있다. 경쟁의 긴장이 전혀 없는 사회가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 지속 가능하기나 할까? 결국 쇠망하고 말 것이란 전망은 아프리카 섬나라의 도도새 멸종 사례가 새삼 일깨워준다. 실제로 학교에서의 상대 평가와 성적 서열화는 전체 학생의 성적을 끌어올리고, 기업에서의 경쟁 시스템은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한 나머지 인간성 상실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부른다는 것이다. 미국의 성공한 기업가 존 록펠러가 “경쟁은 죄악이다”라고 까지 했으니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경쟁은 기본적으로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낳는 구조다. 승리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패배로 좌절감을 맛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경쟁하는 과정은 모두를 지치게 한다. 결국 경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의 씨앗이다.
러셀은 경쟁의 철학에 오염된 세상은 불행하다고 규정했다. 그는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현대 사회의 경쟁이 너무 냉혹하다고 진단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그의 생각을 요약한 것이다. 경쟁은 지나치게 집요할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근육을 혹사시키고, 의지를 집중하게 만든다고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뜻이다.
러셀은 경쟁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일찍이 지구상에서 멸종한 공룡에 비유했다. “선사시대 공룡들처럼 지성보다 근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지성과 감성을 배제한 채 의지와 경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현대판 공룡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는 현대판 공룡이 놀라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어 전 세계 백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룡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100년 동안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행복의 정복’을 출간한 게 1930년이므로 그의 전망은 틀리지 않는다. 지금 분위기로는 경쟁이 줄어들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풍요를 누리는 사회에서조차 경쟁은 여전히 심하다.
경쟁의 정도가 행복의 크기와 반비례하는 것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경쟁에서 지는 사람이 행복할 리 없고, 이긴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 것이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경쟁 결과 이겨서 얻는 성취감은 당연히 행복한 삶에 일정한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들인 고통의 정도가 지나치게 크다면 평가를 달리해야 한다.
러셀은 이런 말로 손익을 정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성공이 행복의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위해 나머지 요소들을 모두 희생한다면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공의 대표적 상징이라 할 돈의 경우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별 상관이 없다고 분석했다.
러셀은 ‘비싼 대가’로 교양과 지식 수준의 저하를 지목했다. 사회 전반적인 경쟁 심화로 문학이나 미술, 음악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신사로 사는 사람이 줄었으며, 대학생들은 캠퍼스 숲 속에 핀 야생화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고 지적했다, 독서클럽이 있어도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전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라고 짚었다. 이런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겨 성공한다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러셀은 말한다.
경쟁의 철학이 일뿐만 아니라 여가도 오염시킨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성공한 사람에게 여가가 생겨도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성공한 것을 가지고 무얼 할지 배워두지 않은 사람은 성공한 후에 권태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여가를 즐길 줄 모르니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러셀은 경쟁적 철학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인들이 공룡의 사생결단식 행동을 꽤 오랫동안 따라 하겠지만 서로 살육을 자행하기 때문에 결국 멸종될 운명에 놓일 것이란다. 경쟁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단하기에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지나칠 경우 자녀를 출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경쟁 대신 쾌활하면서도 즐거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러셀은 예상했다.
러셀의 예상이 실현되는 세상이 과연 올까? 과학기술이 광속으로 발전 중이고, 인구 증가율은 빠른 속도로 낮아지고 있으니 경쟁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일과 경제활동은 인공지능이 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그냥 놀면서 즐기면 되는 세상이 오지 말란 법 없다. 인공지능이 공룡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세상, 아주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수도 있겠다.
잠깐, 그런데 인공지능은 누가 개발하고 관리할 것인가? 그 일을 두고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지금보다 더 극심한 종류의 경쟁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경쟁에서 해방되는 날은 요원하단 말인가?
다행히 요즘 유행하는 ‘공존공생 이론’이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나는 사회생물학자 최재천의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하는 인간)’ 이론에 주목하고 있다. 21세기에는 경쟁을 멈추고 공생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이론은 생명다양성 존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인간사회 내부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적자생존의 세상은 점차 빛이 바래질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남보다 우수하거나 지혜롭다는 자만에 빠져서는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협력을 통해 공생을 추구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 최근 들어 노벨상 수상 현황을 살펴보면 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같은 이공계 상은 공동 수상이 많다. 학자들이 최고의 업적을 거두려면 소속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적이 달라도 과감하게 손잡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생존을 위해서도 협력을 통한 공생은 불가피하다. 당신 주변을 살펴보라. 극심한 경쟁에 내몰려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울증과 불안증이 전혀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자살은 어느 나라, 어느 연령대 할 것 없이 만연해 있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경쟁에서 이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최재천은 말한다.
경쟁은 정글이지만 협력은 사랑이다. 정글에선 혼자 성공하지만 사랑이 있는 곳에선 함께 성공할 수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멋진 말을 남겼다. “남의 잘됨을 축하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경쟁자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당장이라도 손 맞잡고 일할 수 있다. 고통의 경쟁을 내려놓고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경쟁에 따른 고통을 일정 부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남과의 직접적인 경쟁은 가급적 피하고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도모하는 것이 해법일 것 같다. 남과의 경쟁은 두렵고 잔인하지만 나와의 경쟁은 편안하고 성숙한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진작 이를 실천했던 모양이다.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나의 목표는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빌 게이츠)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윌리엄 파울러) “나다운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면 경쟁이란 없다. 내 본질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바버라 쿡) “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나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한다.”(아베베 비킬라)
이런 삶의 자세, 말은 쉽지만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경쟁 심리는 끊임없이 발동된다. 하지만 어쩌랴,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사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