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죄의식 안에는 절망감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갉아먹는 나쁜 감정이 존재한다. 따라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죄의식이란 도덕이나 양심의 기준대로 행동하지 못할 때 생기는 죄책감을 가리킨다. 이런 감정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조금씩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불안’에 이르면 행복 찾기에 걸림돌이 된다. 불안, 우울, 강박장애, 신경쇠약 같은 질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영국 철학자 러셀은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죄의식을 불행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첫머리에 소개한 것처럼 죄의식은 절망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훼손하기 때문에 최소화하지 않으면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러셀에 따르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으며, 남을 칭찬하기보다 시샘하기 쉽다. 또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쉽고, 이는 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갈수록 외톨이가 된다. 결국 절망감은 커지고 불행해진다.
사실 합리적 죄의식은 당연한 것이며, 나쁘지 않다. 사회적으로 합의한 도덕 원칙에 비춰볼 때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를 했다면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죄의식은 양심의 가책을 느낌으로써 깊이 반성하고, 장래에 규율을 잘 지키게 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반대로 명백한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비양심적 언행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비난받기 일쑤다. 설사 위기를 모면하더라도 언젠가 불행의 골짜기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러셀은 ‘불합리한 죄의식’에 관심이 많았다. 전혀 취할 필요가 없는 이런 죄의식을 그는 ‘미신적 도덕 원칙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주로 어린 시절 부모한테 취득한 청교도적 도덕률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다.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며 합리적,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죄의식은 대부분 여섯 살 이전 어머니한테 받은 도덕 교육에서 비롯된다. 욕하는 것은 못된 짓이며, 고상한 말만 써야 하고, 술은 나쁜 사람들만 마시는 것이며, 담배는 최고의 미덕과는 어울리지 않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으뜸가는 가르침은 성에 대한 관심은 더럽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런 가르침이 불합리한 죄의식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그는 위와 같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인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진단한다. 금욕주의자가 아니면 실천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죄의식으로 나타나는데,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린 시절 가르침이 무의식 속에 갇혀있다 드러나면, 이를 지키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타락해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렸던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이 사라진 상태에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어차피 죄를 지을 바에야 더 철저하게 짓고 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러셀의 분석이다.
러셀은 기독교적 원죄 의식도 불합리한 죄의식에 속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에선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를 근거로 모든 인간은 죄성(罪性)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 원죄론을 유지하고 있다. 하느님이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이를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비판하는 삶을 살다 간 러셀은 이런 신학 이론이 기독교 신자들을 괜히 힘들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합리적이지 않은 이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죄의식은 피곤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술에 취했을 때 의식적 의지가 약화됨으로써 활발하게 나타난다. 그는 불합리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어린 시절 무의식 속으로 파고든 죄의식의 경우,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만약 자신의 이성에 비춰볼 때 나쁘지 않다고 판단되는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 원인을 낱낱이 파헤쳐 그것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비합리적인 생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고, 그런 생각이 다시는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성과 유아기 어리석음 사이에서 우물쭈물 방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안겨준 기억을 무시하는 것을 이제 겁낼 필요가 없다.”
러셀은 죄의식이 심할 경우 그것을 신의 계시나 더 고귀한 행동을 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이지 말고 질병, 혹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미신적 도덕 원칙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 어떤 수준의 죄의식이든 그것을 고치려면 반드시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러셀이 말하는 이성에는 과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면 모두 미신이란다.
사실 자질구레한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행법을 위반했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겠지만 그럴 정도가 아니라면 빨리 털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중동의 성자라 불리던 칼릴 지브란은 저서 ‘예언자’에서 우리 모두를 격려해 준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 넘어졌다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넘어진 것이다. 그는 앞서 간 사람들을 위해 넘어진 것이기도 하다. 앞서 간 사람들이 비록 빠르고 확신에 차 걸어갔을지라도 그 걸림돌을 치워주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책감도 죄의식만큼은 아닐지라도 불행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과거의 잘못된 일이 현재의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 매기 때문이다. 자책해 봤자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 에너지만 소모하는 일이다. 주로 신세를 한탄하거나 무기력증을 느끼게 되고, 심하면 우울이나 불안을 야기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책하는 사람을 흔하게 본다. 어떤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바람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떤 사람에 대해 험담을 했다가 그 사람이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 말실수로 어떤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해 속상해하는 사람은 심리적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한 달에 한 권 독서하기로 계획했다가 지키지 못한 사람, 운동이나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포기한 사람, 금연이나 절주를 호언장담했다가 작심삼일이 된 사람도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의지력이 약한데 대한 책망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남들이 이런 사실을 알 경우 수치심을 동반하기도 한다.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당연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자꾸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지나가버렸기에 어떠한 노력으로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웨인 다이어는 저서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죄책감, 혹은 자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여러 전략을 소개했다. 그 가운데 최고의 전략은 지나간 일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과거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미 끝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