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누구나 세상살이에 시달리지 않고 외톨이로 살아갈 수 있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독립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과 독재자뿐이다.”
러셀은 외톨이로 살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과 독재자뿐이라고 했다. 외톨이는 매인 데가 없으니 얼핏 편안해 보이지만 의지할 데가 없으니 외로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첫머리 문장은 러셀이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한 말이다. 가족의 결핍으로 어린 시절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한 철학자의 자기 확신이라 여겨진다.
세상에 외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불어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자발적인 것이 아닌 이상 외로움은 쓸쓸한 고통이다. 대다수의 외로움은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감옥일 뿐이다.
외로움은 정서적 감정이며 주로 ‘홀로 있음’에서 비롯된다.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어 표현을 보면 전혀 다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은 ‘Loneliness’이고 홀로 있음은 ‘Aloneness’이다. 사람은 홀로 있을 경우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셀에게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영국의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불과 2세 때 어머니와 누나, 4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형과 함께 조부모 집에서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정서적 따뜻함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외로움에 떨었던 시절을 회고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어린 시절 내내 정원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정규 학교에 가지 않고 줄곧 가정교사에게서 교육받았기에 또래 친구가 없었다. “유년기 이후 외로움은 커졌고,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행여 만나려나 기대하다 절망하는 일도 많아졌다. 완전히 실의에 빠진 나를 구해준 것은 자연과 책과 수학이었다.”
러셀에게 청소년기는 무척 외롭고 불행했다.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절대 불가침의 비밀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한테도 상의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 예비학교에 다니던 10대 후반엔 우울증이 찾아왔다. “들판을 가로질러 뉴사우스게이트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혼자 일몰을 바라보며 자살을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기에 자살을 단념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외로움은 행복을 내쫓는 주범이다. 저출산 및 고령화와 결혼 및 가족관의 변화, 기술정보 혁명으로 인해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SNS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터넷 공간에 ‘친구’가 많아졌지만 진정한 친구는 별로 없다.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한테 상처를 받아 외로움이 커지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외로움은 일상생활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방치하면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 불면증 등을 유발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국에선 고독사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외로움 장관(Minister of loneliness)’을 둘 정도다. 통계에 따르면, 영국 전체 인구의 13%가 외로움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한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외로움의 가장 큰 원인인 ‘홀로 있음’을 피해 가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저출산 및 고령화 현상은 사실상 되돌리기 어렵고, 비혼 혹은 만혼 추세와 핵가족화는 어느새 굳어져 버렸다. 앞으로 혼자 사는 사람은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홀로 있음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태어날 때도 혼자이고 죽을 때도 혼자가 아닌가?
결국 혼자 있더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 러셀도 이 길을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제각기 떨어져 있는 영혼의 묘한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은 외로움을 발견할 경우 그 사람에게 묘한 유대감이 생기고, 잃어버린 것을 거의 다 보상받는 것 같은 따뜻한 연민이 솟아오른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면 외로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는 철학자의 통찰이 느껴진다. 정신적 성숙은 필수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이런 상태의 홀로 있음을 우리는 ‘고독’이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둘은 영어 표현도 다르다. 고독은 ‘Loneliness’가 아니라 ‘Solitude’이다. 외로움이 부정적 감정이라면 고독은 긍정적 감정이다. 외로움이 아픔이라면 고독은 평온이다. 외로움이 결핍이라면 고독은 풍요다.
‘고독을 즐겨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고독을 외로움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당연히 즐길만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고독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혼자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사귐이나 대화가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오히려 행복하다.
고독을 즐기려면 반드시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야 한다. 비혼이나 이혼으로 배우자가 없거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친구가 거의 없다고 치자. 정신적으로 빈약한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만남이나 대화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쓸쓸함을 거쳐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홀로 있음의 고요를 즐긴다.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 못지않게 유익하고 행복할 수 있다. 조용히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된 내면에 접근할 수 있고, 그 내면의 영혼과 깊이 대화할 수 있다. 특히 고요는 혼자 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에게 일기 쓰기나 사색, 명상을 권하는 것은 고요 가운데 자기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건너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특히 명상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외로움 해결사 대우를 받는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대표적 명상 예찬론자다. 자기 경험을 전하며 하루 두 시간씩 명상을 실천하라고 권한다.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수의 훌륭한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 음악이나 미술 작품 감상, 독서는 예술가, 혹은 작가와 깊이 대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로움에 빠진 사람이 예술을 감상하거나 독서를 하면 어느새 평안과 기쁨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정신적 풍요의 힘이다. 또한 기도는 신과의 대화라 해서 틀리지 않는다. 종교적 믿음이 좋은 사람이 외롭지 않은 이유다.
사실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피한다. 군중 속에서는 정신적 교감이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짚었다. 자기 경험이기도 하다.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은 욕심과 고통을 버리고, 평온하고 여유로운 삶을 찾는다. 그리고 소박한 생활을 한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와 어느 정도 알게 된 후에는 속세를 떠난다.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고독을 선택한다.”
사실 철학자는 모두 고독의 달인이다.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칸트, 파스칼, 니체, 비트겐슈타인 같은 위대한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자발적 고독을 즐겼기에 혼자이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결혼에 따른 여러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로웠기에 자기 성찰과 철학적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경우 자발적으로 홀로 있음을 선택함으로써 잠을 하루 10시간 이상 충분히 자고 독서와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수시로 이사를 다녔고, 주소를 비밀에 부쳤다. 이런 철학자에게 외로움의 고통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자발적 고독은 철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시도해 볼 만하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평생 고독하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쉼 없이 바쁜 일상,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으로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잠시 스스로 혼자가 되어보면 어떨까? 혼자가 되어 자신을 성찰하다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참된 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딱 일주일만이라도 스마트폰과 결별해 보면 어떨까? 많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행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