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사과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한 화가
-미술학교 입시와 살롱 전시회에 연이어 퇴짜 맞은 폴 세잔
*폴 세잔(1839~1906)= 프랑스의 화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림.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목욕하는 사람들’이 대표작.
세상을 바꾼 사과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아이작 뉴턴의 사과와 스티브 잡스의 사과를 떠올리지만 폴 세잔의 사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화단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돌연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해 주겠다”라고 선언한다.
세잔은 당시 풍미하던 인상파 화풍에서 탈피해 자연을 영원불멸의 기본적인 형체로 되돌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형체를 찾으려고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 사과 하나 그리는데 100회 이상 관찰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사과에서 발견한 자연의 기본적인 형체는 구(球), 원기둥, 원뿔이었다. 그는 이런 발상을 정물화에 적용해 성공을 거둔 뒤 초상화와 풍경화에도 확대 적용했다. 세잔의 새로운 미술 기법은 20세기 들어 입체주의와 추상미술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을 “하나밖에 없는 나의 스승”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세잔의 예술적 통찰이 있었기에 자신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 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이름을 남긴 화가는 대부분 ‘천재 화가’다.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던가, 기회를 놓쳤더라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친다. 그런 의미에서 세잔은 전혀 천재가 아니다. 기나긴 시간을 무명으로 살았으며, 중년의 첫 개인전이 성공하고서야 겨우 ‘괜찮은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끈기와 집중력이 없었다면 역사에 한 줄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모자 상인이던 아버지는 후에 은행가로 성공해 부유한 가정을 이끌었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나 법률가나 은행가가 되어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짓눌려 화가가 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 바람대로 엑상프로방스 법과대학에 들어갔으나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시립 미술학교에 들러 틈틈이 그림을 배웠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이왕 그림을 그리려거든 국립 미술학교에 진학해 훌륭한 화가가 되면 좋겠다.” 곧바로 파리로 올라가 ‘아카데미 쉬스’라는 화실에서 그림을 공부했는데, 기대와 달리 동료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23세 때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시험을 쳤으나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듬해 다시 응시했지만 또 떨어졌다.
고향에 돌아와야 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운 은행에서 일하면서도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은행가 세잔, 그대는 전율 없이는 보지 못하리라/ 은행 계산대 앞에서 미래의 화가가 태어난 것을.” 그 무렵 지은 시다.
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한 세잔은 독립작가로서 살롱에 출품했으나 연이어 퇴짜를 맞았다. 가는 곳마다 악평이었다. “세잔은 그림을 괴상망측하게 그린다. “그는 백치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살롱에 입상해야만 미술가로 행세할 수 있었으니 난감했을 것이다. 35세 때와 38세 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도 화단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특히 38세 출품 때는 치명적인 악평을 듣는다.
“세잔의 그림을 보면 태아가 큰 충격을 받아 황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파리 미술계에 환멸을 느낀 세잔은 고향으로 돌아와 묵묵히 자기만의 화풍을 개발한다. 앞서 말한 ‘사과 연구’가 그것이다. 아버지의 재정 지원으로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정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여전히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목로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가 실패한 천재 화가의 자살을 담은 소설 ‘작품’을 발표했는데, 자신을 그 주인공의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에밀 졸라는 세잔의 죽마고우이자 평생 우정을 나눈 사이여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죽을 때까지 연을 끊고 살았다.
세잔은 세상이 아무리 비웃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엑상프로방스와 파리를 오가며 열심히 작업했으며, 이 무렵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같은 대작을 완성한다. 그를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은 56세 때 어느 화상이 마련해 준 단 한 번의 개인전이었다. 젊은 화상 볼라르는 선심 쓰듯 자기 갤러리에 사과 그림을 비롯한 150점을 전시했는데, 저명 화가들이 극찬하면서 비로소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세잔의 옛 동료 화가들과 아방가르드 예술인들은 세잔에게 대가라는 칭송을 보냈다. 피사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세잔의 그림이 주는 매혹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과 미술상들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감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사방에 내보이는 꼴이다’”(‘폴 세잔-색체와 형태의 미학’ 실비아 보르게시, 김희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8)
세잔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끈기의 화가다. 그리고 집중력의 화가다. 훌륭한 그림은 그런 화가에게서 탄생하는가 보다. 자신을 성공하게 만든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릴 때 이야기다. 볼라르는 화실의 상자 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긴 시간이라 깜빡 잠이 들어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세잔은 그를 일으켜주기는커녕 벌컥 화부터 냈다.
“에잇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기어이 작품을 망치고 말았네. 사과처럼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환갑 나이 때의 일이며, 이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매일 4시간씩 무려 15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파리의 프티 팔레 미술관에 있는 이 초상화가 전 세계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이유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