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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열정의 CEO

-재수로 고등학교, 삼수로 대학교 간 수포자 마윈

by 물처럼

*마윈(1964~ )= 중국의 사업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를 창업했으며, 현재는 주석(명예회장). 포브스 기준 세계 30위권 자산가.



키 162 센티미터, 몸무게 45 킬로그램의 왜소한 몸집에다 얼굴에는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다. 학창 시절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 고등학교는 재수, 대학교는 삼수로 겨우 진학할 수 있었다.


이런 청년이 중국을 대표하는 IT기업 알리바바 그룹을 일궈내 세계 30위권 자산가로 성공했다.


항저우 출신으로, 자수성가의 상징이라 할 마윈은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대해 “남자의 재능은 용모와 반비례할 때가 많다”라고 웃어넘긴다. “일반적으로 잘생긴 사람은 공부하는데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우리같이 못생긴 사람은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습니다.” 애써 노력했음에도 학창 시절 성적이 부진했던 데 대해서는 “한 사람의 성공 여부는 EQ와 관련이 있을 뿐 공부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공부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괴로워하거나 창피해하지 마세요, 적게 공부하고도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윈의 이런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인드는 어린 시절 볼품없는 외모와 부진한 성적을 커버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나이 들어 사업에 투신하고는 끈기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젊은이는 모두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열정만이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실패한 다음에 다시 도전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열정입니다.”(‘알리바바 마윈의 12가지 인생강의’ 장옌, 김신호 옮김, 매일경제신문사, 2017)


그러나 마윈은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어린 시절만 놓고 보면 무척 힘들고 암울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에게 얼굴이 외계인 같다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참다못해 친구를 심하게 때리는 바람에 부모가 친구 부모를 찾아가 대신 사죄하고 치료비를 부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연상의 아이에게 덤벼들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아 머리 상처를 열세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성인이 되면 싸움질이나 하는 건달이 되지 않을까 부모가 걱정한 건 당연하다.


공부가 더 문제였다. 마윈은 수학에 도무지 재능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못해 사실상 수포자로 분류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항상 석차가 낮았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도 수학 성적 때문에 좋은 고등학교에는 지원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며, 한 단계 낮은 학교에 지원했으나 그마저도 떨어졌다. 재수 끝에 가까스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대학입학시험에 또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첫 대입 시험에 낙방하고 취업을 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잡지사에 들어가 삼륜차를 몰고 책을 배달했다. 일이 힘든 데다 벌이도 시원찮아 이듬해 다시 대학 시험을 봤다. 그러나 수학을 19점 받고 갈 수 있는 대학은 아무 데도 없었다. 부모는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했지만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듬해 항저우 사범전문대학의 신설된 영어교육학과에 응시한 결과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수학 시험에서 120점 만점에 79점이나 얻은 덕분이다.


대학생 마윈에게 수학은 더 이상 인생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비록 수학은 못하지만 영어를 누구보다 잘해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중학교 시절, 지리 교사의 가르침 덕분에 일찍부터 영어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지리 교사에 대한 회상이다. “호숫가(서호)에서 몇 명의 외국 관광객이 길을 물어오길래 내가 영어로 길을 가르쳐주고 항저우의 경치에 관해 설명해 주었더니 계속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 너희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외국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중국 전체가 부끄러워진단다.”


‘알리바바 마윈의 12가지 인생강의’에 소개된 그의 영어공부 모습은 이랬다. 매일 영어방송을 듣고, 호숫가에 가서 외국인들과 대화하며 말하기 연습을 했다. 실력이 부족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외국인 관광객을 자전거에 태우고 항저우 시내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영어공부는 자신감 함양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 학생회 회장으로 선출되고, 얼마 후 항저우 학생연합회 회장에 뽑혀 대학가의 유명인이 되었다. 졸업과 함께 항저우 전자과학기술대학의 영어 강사로 발령받았다. 학교 내에서 유능한 강사로 칭송이 자자했지만 당시 강사 월급이 워낙 적어 별도로 번역회사를 차려 운영했다. 31세 때인 1995년, 강사를 그만두고 미국을 방문했다가 친구를 통해 인터넷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귀국하자마자 중국 최초의 인터넷 기업을 세웠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회사였지만 당시 중국에는 인터넷이 생소했기 때문에 거래처 사람들로부터 사기꾼 취급을 받곤 했다.


유사한 외국 기업들이 들이닥치며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와중에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에 들어가 인터넷 네트워크 업무를 도맡아서 했다. 이렇게 4년 정도 인터넷과 무역 실무를 단단하게 익힌 마윈은 35세 때인 1999년, 드디어 중국 최초의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를 창업하게 된다. 50만 위엔(약 9500만 원)의 자본으로 45평짜리 마윈의 자택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창업 멤버 18명은 매일 17~18 시간씩 일했다. 처음에는 작은 방에서 인터넷을 설계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이었다. 순탄했을 리 없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골드만삭스와 소프트뱅크로부터 거액을 투자받을 수 있었다. 마윈의 예상대로 전 세계적으로 전자상거래 수요가 급증했고, 알리바바는 창업한 지 불과 2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마윈이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표지 모델이 되면서 사업도 급성장했다. 끈기의 힘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즐겨한다.


“작은 총명함보다 바보 같은 끈기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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