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름 기억하기

by 구자훈


여름장면 1

28/38, 29/36, 28/37, 28/36, 29/35/ 28/35, 27/36

이게 무슨 숫자이지 하고 갸우뚱하실 거다. 별거 아니다. 올여름 7월 마지막 주와 8월 초입까지 서울지역 최저/최고 온도이다. 참으로 더웠다. 열대야가 연속 44일을 기록했다고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에어컨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7월과 8월을 가득 채웠다. 도심의 매미 소리가 더위만큼이나 들끓는 거리에는 얼굴과 손풍기가 붙은 일체형 인간들이 흐느적거렸다.



여름장면 2

아이가 한 살이 되었다. 우리 곁으로 온 지 어제 같은데 반짝이는 눈빛으로 장난을 칠 정도로 자랐다. 더위를 뚫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한 살 생일을 맞았다.

“2024년 7월 26일 금요일

날씨 : 어제 늦은 저녁에 동남아 스콜처럼 비가 왔다. 아침에 파란 하늘이 열렸고 흰 구름이 파스텔톤으로 흩어져 있다. 25.3도. 어제보다 1.5도 낮다(체감 28.3도). 습도 94%, 남풍이 조금 분다. 미세. 초미세먼지 좋다. 일몰은 19:46분

오늘은 나의 몽몽이가 나오는 날이다(중략) 사위의 카톡 메시지 ”잘 태어났어요. 스리는 회복 중이에요 “를 보면서 내 가슴이 빠르게 뛴다. 입을 부드럽게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세상에 둘도 없이 편안한 모습의 아이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초음파 영상으로 보던 몽몽이와 첫 대면이다. 목이 멘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이런 기분이었는데, 아이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여름장면 3

땀이 주룩주룩 흐른다. 양재천 영동 3교 아래에서 2시 버스킹을 위한 무대 조성을 돕고 있다. 공연을 자주 하는 색소폰 동호회인데, 가입한 지 1주일 만이다. 7월 20일 오후 2시. 영동 3교 아래에는 나무로 마감한 계단 형태의 공연장이 있다. 한때 이곳에서 했던 버스킹 행사에는 800여 명이 모였던 적도 있었단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볼 때 과히 과장된 숫자는 아닌듯했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시니컬한 분들의 민원과, 결정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공연장을 찾는 시민의 수는 대폭 줄었다. 그날은 더위를 피해 나온 20~30여 명의 시민뿐이었다. ‘아름다운 강산’과 ‘풀잎사랑’을 신나게 불었다. ‘신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고 연주를 들었던 이들의 느낌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살펴볼 여유가 내겐 없었다. 어떻게 연주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장면 4

조리장과 길상사는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같은 장소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붙어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반찬 조리장에는 30여 명의 여성과 두어 명의 남성 자원봉사자가 470명분의 반찬을 만들다 보니, 그들이 일하는 목요일에는 늘 분주하고 시끌벅적하다. 나머지 시간은 밤낮없이 조용하다. 반면, 길상사는 관광객으로 일주일 내내 붐빈다. 절이 절답게 조용해지는 때는 해가 기울어 그들이 떠난 후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절은 일순간 깊은 산속에 있는 산사처럼 고요해진다.

저녁 길상사에 내리는 고요함의 깊이를 경험한 것은 명상 수련을 주제로 한 템플스테이를 위해 절에서 난생처음 하룻밤 묶을 때였다. 절집이 어둠에 잠겨 들자, 소쩍새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빈 절에는 침묵이 가득히 내려앉았다. 그때 마침 보름달이 탑 위로 떠올랐다. 복작대던 발걸음과 한낮의 햇볕이 하얗게 부서지던 극락전 앞마당을 노란색 달빛이 가득 채우고 있는 고요함이라니. 우주의 태곳적 침묵이 그곳에 있었다.




여름장면 5

배에서 내리는 순간 가슴이 뻐근했다. 마치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한 듯 가슴이 떨리고 뿌듯하고. 독도에 첫발을 내디딜 때 설레고 그랬다고 고백한다. 난생처음 울릉도를 갔고 첫 독도 입도가 호수에서 배를 탄 듯 부드러웠으니 우리 일행은 꽤 행운아이다. 독도에서 돌아온 그 오후에 성인봉을 올랐다. 그 길을 좀 기억해 보자.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길이 산등성이를 따라 나 있고, 잎이 기다란 연초록 고비가 매끈한 수피를 가진 나무 아래를 온통 덮고 있다. 푸른 볏짚 같은 고비는 성인봉을 그러안고 비 맞지 않도록 덮은 듯하였다. 고비 위로 쭉쭉 뻗은 매끈한 나무 이름은 뭘까 생각하다 딱 와닿은 문장. 허태임의 초록목록에 “울릉도 성인봉 가는 길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너도밤나무 자생지가 있다.” 그 숲이 말로만 듣던 너도밤나무 숲이었다. 흰 꽃자리에 노란 열매를 이고 있는 마가목이 많아서 성인봉 푯말이 세워진 정상에도 3면을 둘러싸고 있다. 하루 만에 독도에 발을 딛고, 성인봉 정상까지 올랐으니, 여름의 기억 목록에 오르기 충분한 여행이다.



여름장면 6

38도의 온도가 들끓는 한낮이 하릴없이 느껴진다. 이 숲에 들어온 지 채 반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계곡을 따라 난 길에는 청정한 물소리가 깊은 두께로 덮였고,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으니 좀 전까지의 열기가 씻길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천상의 야생화 화단으로 이어지는 산길, 점봉산의 곰배령에 이르는 길이다. 40명이 길게 늘어져 깊고 긴 숲 속 길을 걷고 있다. 다소 가파른 길. 쉽지 않은 여정이나 모두 조용한 침묵으로 오르고 있다. 참나물 하얀 꽃대가 목을 길게 뻗어 피어 있고, 앙증맞게 숲에서 몸을 흔들던 노란 동자꽃은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는 듯 씨앗을 매달고 있다. 이제 곰배령에 이르는 막바지 가파른 길을 따라 노란 꽃을 머리에 조롱조롱 달고 노루보다 훨씬 긴 목을 흔드는 마타하리가 반긴다. 점심을 먹는 전망대에는 가래나무가 열매를 튼실히 달고 있다. 이마를 스치는 바람이 일자 넓은 잎사귀를 살짝 들어 점봉산과 대청봉을 보여준다.

홀아비꽃대 그림.jpg

이런 자연에게 나는 뭘 보여주어야 하나. 내 기억 속에 오늘의 여름을 갈무리해 두는 게 내가 곰배령에게 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시가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숲에서 본 네 잎클로버 닮은 홀아비꽃대의 잎이 생각났다. 잎 한가운데에 뾰족탑같이 솟아오른 흰 꽃은 보이지 않고 푸른 잎사귀에 굴파리 흔적이 구불구불 남아있었다. 굴파리가 홀아비꽃대에 남긴 흔적이 내 여름의 시간인 듯 동화된다. 곤충이 겪은 시간이나 내가 지나온 그것은 우주에 남긴 작은 점이다. 홀아비꽃대에 남은 굴파리 흔적에 내 여름의 기억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