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남겨진 자의 기록
여느 때처럼 그의 아침은 활기로 가득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하듯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갓 구운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몸을 리듬에 맡겨 흔들었다.
삶에 만족하는 사람의 여유였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기 전, 그는 반짝이는 차량 표면을 조심스럽게 훑으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도로 위로 햇살이 번지고 코팅된 차유리를 통해 빛이 굴곡하며 튀어 오르자 기분이 들떴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 도로에 멈춘 그는 , 문득 잘 짜인 운명의 손짓에 응답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머리를 묶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걷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경리였다.
그녀가... 여기 있을 리 없었다.
현수는 그대로 핸들을 꺾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반응했지만,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경... 리”
그 말을 다 뱉기도 전에, 차량은 미끄러졌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급하게 꺾인 차는 도로를 돌며 펜스를 들이받고 뒤집혔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람에 휘날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여기 119 좀 불러요!”
“차가 뒤집혔어요! 사람이 안에 있어요!”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구급대원들의 다급한 손길 사이로,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힘없이 늘어졌다.
잠깐 보아도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가 급하게 돌더니, 꽝하고 뒤집혔어요.”
목격자의 말에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리야, 가자. 예약 시간 다 됐어.”
사람들의 웅성 거림에 잠시 발길을 멈췄던 경리의 어머니가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병원 쪽으로 향했고, 경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그 뒷모습을 현수의 눈동자가 조용히 좇고 있었다.
피로 물든 눈으로, 미처 닿지 못한 말 한마디가 토해내는 짧은 숨 속에 맺혔다.
“경리... 경... 리...”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소란에 묻혀버렸다. 왜 이 순간에 그리도 경리가 절실한지 현수는 알지 못했다.
사고 현장을 지켜보던 무리 속에, 태석의 모습도 있었다.
그는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누군가의 생사현장을 조금은 안쓰러움으로 흘끗 스쳐보았다.
“죽는 것도, 한 순간이네...”
익숙하게 좌판 위 낡은 물건들을 정리하던 손이 문득 멈췄다.
이상하게, 하늘이 맑았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었다.
몇 달 뒤, 태석은 넥타이를 매고 옥탑방을 나섰다.
몇 년 만의 동창 모임. 이제는 가도 될 것 같았다. 아니면 조금 외로웠던 걸지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 그는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일상 같았던 넥타이가 사슬처럼 옥죄이며 목을 맨 듯 답답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조금은 긴장한 채 화장실로 향하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야, 오늘 현수 새끼 오겠지?”
“뭔 소리야? 걔 죽었잖아.”
“뭐? 죽어? 언제?”
“6개월쯤 됐어. ㅇㅇ동에서 교통사고로. 장례식장도 갔었는데…”
순간, 태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6개월 전... ㅇㅇ동...?’
그날...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사람들의 웅성임과 경찰의 호각소리, 구급대원의 다급한 발걸음.
피에 젖은 얼굴, 꺼져가던 숨소리, 그리고 흐릿한 두 눈동자.
태석은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잊혔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의 사고였기에.
그것이 현수의 마지막이었다고?
태석은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했다. 심장이 쏟아지는 듯했다.
“죽었다고...? 그 새끼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수는 죽었고 , 그는 땅에 묻혔지만, 상처는 여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감정. 태석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그토록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동창회 자리로 돌아온 태석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사람들 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경리, 기억나냐? 걔 진짜 현수한테 많이 당했잖아.”
“우리 중에 안 당한 사람 있냐? 경리는 유독 말이 없어서 현수가 더 괴롭힌 것 같아.”
“경리도 힘들었을 거야. 야, 씁쓸하다. 다들 한잔하자.”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하지만 태석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근데 태석아, 넌 요즘 뭐 하고 사냐?”
순간, 모든 시선이 태석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노일까. 후회 일까?
‘니들이 인간이냐? 뭘 기억하려는 건데? 그땐, 아무도 말하지 않았잖아.’
그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채찍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도시의 밤은 묘하게 진한 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거리는 수많은 빛으로 번쩍였고, 자동차 불빛에 반사된 간판들은 마치 과거의 단편들처럼 태석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속은 여전히 메스꺼웠고, 정신은 또렷한 듯 멍했다.
그는 경리를 떠올렸다. 아니, 기억해 내야 했다.
현수의 발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녀가 태석을 바라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을 기억해야 했다.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우리 모두의 눈빛을.
그것이 남겨진 자들의 기록이기에.
바람은 차가웠고,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은 식을 줄을 몰랐다.
밤이 깊어질수록 태석의 발걸음은 무거워졌고, 한참을 걷다가 그는 계단을 올라 옥탑방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불을 켜고, 작은 책상 위에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졸업앨범을 꺼냈다.
그리고 접어 두었던 조각난 기억 속에서 경리를 찾았다.
경리는 식탁 위에 놓인 컵에 물을 따르며 약을 삼켰다.
오늘따라 약이 유난히 목에 걸려 삼켜지지 않았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오랜만에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 바람은 해변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의 마음속 기억이 흔들리는 걸까.
빌딩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은 마치 등대처럼 창가를 은은하게 비추었고,
그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경리는 순간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이리 높은 곳이 보일리 없었지만 그녀는 숨는 것이 익숙했다.
낯선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익숙한 그림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떨림이었다.
그 떨림 속엔, 바다 냄새가 묻어 있었다.
그렇게 이브의 섬은 출렁임을 멈추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잊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