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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한장이야기 Jul 03. 2023

여름방학

그림 이어서 말하기

저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매번 주제도 다르고 소재도 다르고 그림체도 변합니다. 그렇게 중구난방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우연히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죠. 오늘 이야기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여러 영화들의 짜깁기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림 이어서 말하기

여름방학


올해 여름의 시작은 비가 내렸다. 갑작스러운 여름비는 많이 당황스럽지만 겨울비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근처 카페로 잠시 몸을 피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을 보며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눈을 감고 상념에 빠질 때쯤 나는 그 시절 여름방학으로 돌아가있었다.



도시에 사는 나는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 할아버지댁으로 놀러 가곤 했다. 기차역을 지나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꼭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어린 나에게는 고난의 순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계단 위로 보이는 풍경은 참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 같다. 계단 끝에 걸려있는 뭉게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혼자 사셨는데 언제나 어린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가끔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리고 시골에 온 나에게 할아버지는 꼭 해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렇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머리카락을 잘라주셨다. 여자인 나는 여름방학 때만 되면 그렇게 사내아이가 되었다. 젊은 시절 이발소를 하셨다는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 이발이 취미셨다. 아이들은 재수 없으면 지나가다 할아버지에게 잡혀 꼼짝없이 이발을 해야 했다. 아이 부모님들은 공짜 이발에 환호하였지만, 동네 아이들이 모두 똑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게 되어서 부모도 자기 아이를 찾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시골에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친척도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혼자만 놀았던 나는 친척 언니, 동생과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마당 있는 집은 지금까지도 나의 로망이다.

건널목을 건널 때, 손 드는 것을 한 번도 빼먹은 적 없는 나는 누가 보아도 도시 아이였다. 그런데 시골에 오면 완전히 다른 아이로 변했다. 시골이 고향인 양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시골아이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너무도 느렸는데 시골에서는 너무도 빨리 흘러갔다. 속절없이 지는 해가 야속할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비행기는 동네에서 가장 높이, 멀리 날아갔고, 말뚝박기라는 과격한 놀이도 처음 배웠다. 시골 동네 강아지들은 나를 잘 따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를 왜 따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난 동네 개들의 왕이었다.




할아버지 옆집 친구분의 손자와 친구가 되었는데 우리의 공통점은 수박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수박 한 통을 해치우곤 했다. 배탈이 나긴 했지만 수박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 친구와 나는 반복되는 여름방학 동안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고 방학이 지나서도 편지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세월은 나에게 초등학교 졸업이란 원하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 나의 여름방학은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끝이 났다. 중학교를 지나, 악몽 같은 수험생의 시대. 고등학생의 삶이 시작되었다. 시골의 여름방학 추억이 사라져 갈 때쯤 고등학교의 어두운 시절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 떨어졌고 패배자로서 남겨졌다. 그때 돌아갈 곳은 그곳뿐이었다. 나의 시골.

아무것도 안 하고 시골집 마루에 누워만 있던 그때, 하는 일이라곤 가끔 뒷동산을 산책하는 거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남자가 내게 쪽지를 건네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쪽지에는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조선시대에도 쓰지 않았을 초 희귀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하게 될 것을... 일주일을 보내며 내 마음을 바꿔보려고 애썼지만 그 쪽지는 마법의 힘이 있었다. 전화를 걸게 만드는 마법.


그를 다시 만나던 날, 그는 내게 손가락 총을 날렸다. 정말 내 취향이 아닌 남자였다. 얼굴이 조금만 더 못생겼더라면 그때 바로 뒤돌아 갔을 것이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고 그는 "총을 맞았으면 총 맞은 시늉을 해야죠!"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어이가 너무 없다 보면 이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가슴에 총 맞은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 너희 할아버지 옆집 살던 그 아이야. 너의 베스트 프렌드!"




비가 그쳤다. 이번 여름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비가 그친 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카페문을 열고 그가 들어온다. "우산 가져왔는데 비가 그쳤네." 그렇다. 수박 좋아하고, 쪽지를 건네고, 손가락 총을 발사하던 그가 내 남편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시골의 그곳으로 달려간다. 지금은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그 시절의 사람들도 거의 없지만 우리의 여름방학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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