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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한장이야기 Aug 28. 2023

추억팔이에도 급이 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CJ E&M이란 회사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는데 공을 세운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드라마 부분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저는 드라마를 별로 보지 않는데 그나마 재미있게 본 작품들 중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네요. 개인적으로 추억팔이하는 콘텐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거부하기 힘들더군요. 특히 시리즈 중 "응답하라 1988"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응답하라 1988

추억팔이에도 급이 있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요즘 지상파들의 일부 주말드라마들을 보면 솔직히 AI가 썼다고 해도 수긍이 될 정도로 판에 박힌듯한 전형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줍니다. 수십 년 동안 무한반복되는 자기 복제입니다. 이런 경향은 추억팔이 콘텐츠에서 가장 쉽게 나타납니다. 추억에 기댄 문화상품에 강한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현재의 표준을 반대하고 왜곡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김수현"이라는 걸출한 드라마 작가가 있었습니다. "청춘의 덫"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등등 대한민국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죠. 개인적으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함께 저의 최애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 대단한 작가가 더 이상 비상할 수 없었던 이유는 추억의 가치를 무리하게 현실로 옮기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격적인 이야기를 시도했던 진보적인 작가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예전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고집도 부렸죠. 할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대가족 중심의 가족문화를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작가는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응답하라 1988"도 추억팔이 드라마입니다. 대놓고 제목부터 추억팔이이죠. 그러면 이 드라마는 무엇이 다르기에 거부감이 덜 했던 것일까요? "응답하라 시리즈"의 추억팔이는 판타지 장르와도 같습니다. 현재에는 일어날 수 없는, 아주 먼 마법의 시대에서 벌어졌던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죠. 절대 현재에서 추억을 실현시키지 않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나십니까? 과거로 돌아간 덕선이가 쌍문동에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과거의 그들이 너무도 반가운 덕선이는 눈물을 흘리며 "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라고 묻습니다. 곧 덕선이와 친구들은 드라마 첫회의 장면과 똑같이 영웅본색 2를 보죠.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립니다. "ㅇㅇ아 밥 먹어라~" 밥 먹으러 일어서는데 덕선이와 친구들은 초등학생으로 변합니다. 시간을 역행하며 아름다운 판타지의 끝을 맺습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야 합니다. 추억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재의 기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추억팔이는 현실을 왜곡합니다. 아름다운 추억팔이는 잠깐의 시간여행을 다녀오게 합니다. 시간여행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친구" "우정" "사랑" "실패" "좌절" 그리고 그 시대를 넘어 현재에 도달한 "나, 자신에 대한 기특함"에 벅차오르게 됩니다.


봉황당 골목을 다시 찾았을 땐,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골목도 나이 들어버린 뒤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건 내 청춘도,
이 골목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기어코 흐른다.
모든 것은 기어코 지나가버리고,
기어코 나이 들어간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눈부시게 반짝거리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겹도록 푸르던 시절,
나에게도 그런 청춘이 있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루었던 연도는, 방영순서순으로, 1997년 1994년 1988년입니다. 차기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를 다룰 것이란 루머가 있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요. 먼 미래에는 2019년부터 시작된 팬데믹의 해도 좋은 소재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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