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나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나오코와는 다른 의미에서요.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은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하는 것도 잘 알 수 없을 거구요. 그러니까 아까 레이코 씨가 얘기했듯, 나와 나와코는 서로를 구제해야만 할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 외에 서로를 구원할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7-8년 전 쯤, 그러니깐 나도 책의 주인공들처럼 스무 살이던 무렵,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책을 처음 읽었다. 그 때는 다 읽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이 내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작품이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하루키 책은 어렵고 이해도 안된다는 편견을 갖게 되어 최근까지도 그의 책을 읽지 않았었다. 우연히 하루키의 '먼 북소리' 라는 책을 읽고 그의 책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런 계기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 책도 다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참 억울할 뻔 했겠다.
책을 읽을 때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손에서 놓지 못하겠는 느낌은 언제나 소중하다. 그런 책을 만날 때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한 마음이 든다. 다시 읽은 이 책이 그러했다. 읽는 내내 가슴뛰게 설레이고 행복했다.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씨까지. 모두가 마음의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각자 호의와 애정을 갖고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에게 의존한다. 그들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아주 많이 '사랑'한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바틀림'을 함께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끝내 죽음을 택한 것이고, 나오코에게 애정과 책임감을 느끼지만, 결국에는 '함께 살아 호흡할 수 있는 미도리'를 택한 와타나베도 결국은 두 사람 모두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오코를 잃은 뒤에 깊은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자신이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혼란 속에서도 '하염없이 미도리를 부르고 있는' 와타나베의 모습. 이 모습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진정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어, 전화 부스의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냐?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로랄 것도 없이 걸어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하염없이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70
내가 태어나기도 더 전에 출판된, 거의 30년된 책인데, '사랑'과 '죽음' 그리고 언제나 쉬이 여겨지지 않는 '섹스'라는 테마까지도 이토록 애절하고 깊이있게 표현해냈다는 것이 놀랍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지금의 나는 내 삶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에 대한 경험치가 늘어나기도 했고, 그 동안 생각과 이해의 폭이 달라지기도 했을테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변화를 통해 나는 이 책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따금 몹시 쓸쓸한 기분이 들 떄도 있지만, 나는 대충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네가 매일 아침 새들을 보살펴 주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의 현관문을 나서서 도착할 때까지 나는 한 서른여섯 번 정도 차르르륵 차르르륵 태엽을 감는다. 자 오늘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함으로 해서, 자 태엽을 감고 오늘을 더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그곳에서 착실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이곳에서 잘해 나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 P323
5년이나 10년 뒤 쯤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때에도 여전히, '그렇지,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지' 라거나, '그래, 나 또한 이렇게 태엽을 감아야 하는 것이구나, 매일매일 더 성실히 살아가기 위해' 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는 이미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스무살, 그 때를 한참이나 지나왔지만 흘러간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런 때가 아닐까. 읽히지 않았던, 이해할 수 없었던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거나, 그래도 내가 아직 '봄날의 곰' 같은 표현에 설레일 수 있구나 라는 깨달음 같은 것.
이 책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기에 있는 한 우리들은 타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도 되고, 타인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가 자신이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외부 세계와 전혀 다른 점입니다. 바깥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비틀림을 의식도 못한 채 지내고 있죠. 그러나 우리들만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틀림이야말로 그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 P151
"아마 난, 머리가 나쁜가 봐"라고 나오코는 말했다. "이곳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겠는걸. 나 자신을 아직 잘 모르는 것처럼."
"머리가 나쁜 게 아니구, 보통이야. 내게도 나 자신의 일인데도 모르는 게 수두룩하니까. 보통 인간들은 다 그런거야." : P187
"나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나오코와는 다른 의미에서요.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은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하는 것도 잘 알 수 없을 거구요. 그러니까 아까 레이코 씨가 얘기했듯, 나와 나와코는 서로를 구제해야만 할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 외에 서로를 구원할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P195
"나를 이해해서,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참, 너는 내 말뜻을 모르는구나"라고 나는 말했다. "어쩌자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세상에는 시각표를 읽고 있는 사람이 있지. 혹은 성냥개비를 연결해서 길이 일 미터짜리 배를 만들려 하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이 세상에 너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하나정도 있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취미 같은 그런 걸까?"라고 나오코는 잘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취미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일반적으로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런걸 호의라든가 애정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네가 취미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 P235
"아주 귀여워, 미도리"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아주라니 어느 정도?"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마를 정도로 귀여워. 네가 무척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요?"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그게 뭐에요,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걷고 있었더니 말이야, 저쪽에서 비로드같이 털이 보들보들하고 눈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새끼곰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그리곤 너한테 이렇게 말하지. "안녕,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기 안할래요."하고 말이야. 그리고 너랑 새끼곰이 서로 꼭 껴안고 클로버가 무성하게 돋은 비스듬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하루 종일 노는 거야. 어때 근사하지?"
"정말 근사해요."
"그만큼 네가 좋아." : P376
어이 기즈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와는 달리 나는 살기로 결정했고, 그것도 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너도 분명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나 역시 고통스럽다. 정말이다. 이렇게 된 것도 네가 나오코를 남겨 두고 죽어 버린 탓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절대로 저버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고 그녀보다는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보다도 한층 강해지려 한다. 그리고 성숙하겠다. 어른이 되겠단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인 채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이미 십대의 소년이 아니다. 나는 책임이란 것을 느낀다. 알겠나 기즈키, 난 이미 너와 함께였던 시절의 내가 아니라구. 난 벌써 스무 살이 됐단 말이다. 그리고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보상을 어김없이 치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402
4월이 다 지나가고 5월이 찾아왔지만, 5월은 4월보다 더 잔인했다. 5월이 되자 나는 무르익은 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떨림은 주로 해가 질 무렵에 찾아왔다. 목련꽃 향기가 아련히 떠도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이유도 없이 부풀어오르고, 떨리고, 그리곤 아픔이 찌르고 지나갔다. 그럴 때 나는 눈을 꼭 감고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는 그것이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그것들은 지나쳐 뒤에다가 둔중한 통증만을 남기고 갔다. : P412
"네가 입는 옷이라면 무슨 옷이든 다 마음에 들고, 네가 하는 일도 하는 얘기도 걸음걸이도 취하는 모습도, 무엇이라도 다 좋아해."
"정말 지금 이대로라도 좋아요?"
"어떻게 바꾸면 좋은 건지 모르겠으니까, 그대로라도 좋아."
"얼마만큼 나를 좋아해요?" 라고 미도리가 물었다.
"세계에 있는 모든 정글의 호랑이가 녹아서 버터가 돼 버릴 정도로 좋아"라고 나는 말했다. : P426
그냥 놔 두어도 세상일이란 저 흘러갈 데로 흘러가는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을 때는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 씨도 이제 슬슬 그런 인생의 참모습을 배워도 좋을 때입니다. 와타나베 씨는 때때로 인생을 자신의 방식에 끼워 맞출려고 하지요. 정신병원에 들어 가고 싶지 않으면 좀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세요. 나같이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라도 살아 있다는 일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 생각해요. 정말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와타나베씨도 훨씬훨씬 행복하게 되세요. 행복해지도록 노력하세요. : P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