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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resavie Dec 06. 2016

멈추지만 말아요 우리 『끝의 시작』

끝의 시작 / 서유미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바른 색은 지워질 것이고 다시 냄새가 날 테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른 색으로 칠하고 새로운 향수를 뿌린다. 그게 견디는 방법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견디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요즘같이 마음이 흐트러질 때에 내가 열중하게 되는 건 책읽기와 서점에 가는 일이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경계하며 부지런히 책을 들여다보다 때때로 멍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이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달아날 때면 읽어 내려가던 문장의 의미가 아득해져 몇 번이고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일상적으로 웃고 떠들어야 할 시간을 견디지 못해 한 시간뿐인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점으로 간다. 수많은 미지의 책들이 나란히 놓여서 저마다 내뿜는 열기와 기대 앞에 서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누구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는 허무한 마음이 차오를 때 나는 당연하게 서점을 찾곤 했었다. 


어제 서점에 들러 사온 이 책은 요즘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는 서유미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아직 두 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토요일 아침 시간임에도 반짝반짝 탱탱한 얼굴로 친한 언니와 수다 떠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그녀의 글이 궁금했다. 수업에서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한없이 유쾌할 것 같고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에 도가 튼 것 같으며 개개인의 특징을 예리하게 알아보는 사람인 것 같다는 정도였다. 작가는 이 책을 마치며 '모든 살아 있는 것이 경이롭고 안쓰럽고 가엾다는 걸 절감했다'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는 분명 누군가의 쓸쓸한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을, 한숨조차 마음껏 내뱉지 못하는 삶의 무게를, 툭 치면 와락 터져 나올 것 같은 슬픔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한참 동안 말과 뒤섞인 울음을 토해 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해봤다. 아무것도. 너무해, 와 아무것도, 를 반복하며 엄마는 오열했다. 엄마는 손에 닿는 것이 놓쳐 버린 세월, 붙잡고 싶은 삶이라도 되는 양 셔츠를 입은 영무의 가슴팍을 꼭 그러쥐었다. 가능하다면 영무는 자신의 시간을 뚝 떼어 주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심정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에게 삶이란 붙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둘러 흘려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 P 24



                                                                                                                 

영무는 암 선고를 받은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두 달여의 시간 동안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 그녀의 죽음을 지켜본다. 그의 아내 여진은 시어머니의 투병으로 영무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음을 알면서도 "내가 좀 살고 싶어서 그래."라며 이혼하자고 말한다. 영무는 이혼 자체보다 이혼의 타이밍에 더 절망하며 "엄마가 시간이 많지 않아. 길어야 두 달이라니까. 기적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그 말대로 되겠지. 그러니까 이혼은 조금만 미루자"며 두 사람의 헤어짐을 유예한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영무의 우편 취급국에서 일하는 소정은 아빠의 투병과 죽음으로 가난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취업 준비에만 매진할 만한 여유도 없어 인턴과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간다. 소위 '중산층'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남자친구 진수에게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받지도 못하고 결혼이라는 미래 앞에서도 주춤하며 관계를 이어 나간다.





아빠라는 수입원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건 가족들에게 슬픔보다 공포와 재앙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보듬고 위로하고 마음을 합쳐서 기운을 내면 좋을 텐데 엄마와 남동생, 소정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마음이 뾰족해져서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상처를 입혔다. 아빠의 죽음을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불행의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 P 41



두 개의 마음이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처럼 자신에게 매몰되어 가족을 버리게 될까 봐, 방바닥에 길게 누워 검은 그림자를 만들게 될까 봐, 그게 아니면 엄마처럼 인생을 전부 자식에게 내어주고 빈껍데기가 될까 봐어떤 관계도 맺거나 확장하고 싶지 않았다. : P 112


       
                                                                                                    

내가 봤을 때 소정은 가난으로 인한 무게를, 영무는 어릴 적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짊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그런 영무를 깊이 알지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결혼해버린 여진 또한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에 하루하루 지치고 불행해져갈 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상처 줄지언정 하나같이 악하진 않다. 작가의 말처럼 가엾고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게 든다. 책에선 이렇다할 기쁨이나 행복의 감정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작가는 시종일관 끈질기게 사람의 감정, 장소가 머금은 분위기, 계절의 변화까지도 꼼꼼히 이야기한다.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친절해서 개인적으로는 읽기에 편했다. 





사람들은 여진이 무기력하고 심리가 불안정한 게 유산의 충격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건 반쯤 맞고 반쯤 틀린 말이었다. 그녀가 잃은 건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건 삶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러니깐 새로운 삶 그 자체였다. : P 155



                                                                 

                                      

당장 이들에게 새로운 삶, 좀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시어머니가 여진에게 마지막 유품으로 남긴 '레이스 달린 양말, 스카프, 몇 번 쓰지 않은 가죽 지갑, 손거울과 큐빅히 박힌 머리핀' 같은 사소한 물건들이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채용까지 몇 개의 관문이 더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로소 원하던 회사에서 면접 볼 기회를 얻은 소정에게서 결코 끝이 아닐 '끝의 시작'을 만나게 된다. 

봄, 여름, 가을을 성큼 지나 거짓말 같이 들이 닥친 겨울 추위에 몸을 떨게되는 지금처럼, 언제나 새로운 계절은 시작되고 그렇기에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에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이게 된다. 누구는 이 책을 '베인 상처 위에 붙일 수 있는 밴드'같은 소설이라 했다. 상처 난 자리에 붙이는 밴드 한장은 그저 상처가 있다는 것을 표시할 뿐 상처를 아물 게 하는 것은 결국 피부의 재생력일 것이다. 때론 연고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지만 결국 내 상처를 감당하고 치료하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그러나 '밴드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가.' 
밴드가  필요한 요즘이다. 책을 읽는 순간엔 이 책이 내게도 밴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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