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한걸음 / 서유미
그런데 서른셋씩이나 되고 보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삼십대는 빛나지도 않고 젊음의 절정도 아니며 여전히 바람과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키를 넘기는 태풍 속일 뿐이다. 안정적인 궤도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가슴을 짓누른다. 인생은 점점 더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피 속에는 세상의 찌꺼기까지 잔뜩 끼어 혼탁해진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독하게 마음먹고 인생이라는 밭을 다 갈아엎기 전에는 말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 P67
매 년 마지막 달력이 넘어가기 직전인 이맘때쯤이면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사는 것 같다. 현재 나이의 시간과 곧 다가올 한 살이 더 보태어질 나이의 시간. 나이라는 건 차곡차곡 당연하게 쌓여가는 것인 줄 알면서도 12월만 되면 언제나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한 살 더 먹을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건 아마 시간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틈도 없이 어제는 정말 어제가 되었고 순간은 끝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지금 이후의 시간만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시간의 정직함만큼이나 나이를 먹는 일 또한 미룰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없다.
이 책에는 청춘이라고 하기엔 왠지 무겁고 짊어져야할 책임은 그만큼이나 버거운,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너무 위태로워 보이지만 있는 힘껏 어른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서른셋의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서른셋이라는 나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완전한 어른일 것 같은, 응당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그 나이가 내게는 더 오래도록 까마득하게 느껴질 줄 알았다. 지금 내가 이십 대의 끝자락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어서 일까, 사람 일은 쉽게 알 수도 없고 단정 지어서도 안되지만 나는 주인공 '연수'가 마치 몇 년 후의 내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쉽사리 책을 놓지 못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공부에, 또 어느 시기에는 사랑과 일에 몰두해야 한다. 또 어느 시기에는 고민을 해야 하고 어느 때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런데 스물다섯일 때도 서른일 때도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늘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과연 어느 시기일까. 무언가를 시작해도 될까. 굳이 보편적인 삶의 행보를 따라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삶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럴 만큼 배포가 큰 인물도 못 된다. : P98
주인공 연수는 결혼 적령기의 압박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정 떨어지는 이유로 돌변하는' 지경에 이른 지리멸렬한 연애를 끝낸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실직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먼저 사표를 내던지고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된다. 그 후에는 현실적으로 재취직을 택하는 대신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영화 공부를 시작하며 영화평론가로 입성하겠다는 꿈을 꾼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불안이 몰려왔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착착 계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몸은 피곤하지만 해방감이나 성취감이 느껴지는 저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날이 막막한 나에게는 불면의 밤이 될 것 같았다. : P101
하지만 그녀가 상황을 막무가내로 낙관하거나,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매일매일 도서관에 가서 영화 관련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새로운 일상을 밀고 나갈 뿐이다. 그녀의 말대로 서른셋은 '크리스마스의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 나이' 이니까. 그저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막막하고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감내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회사가 망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거기 앉아서 몇년 더 개갰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 따위는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변화 같은 건 달갑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되는대로 살았을 것이다.
'백수가 돼서 두려워?'
'아무래도 좀.'
선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니까. 마지노선이라고 정해놓은 수면 아래로 추락하는 거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 두렵지 않은데 당장 수중에 돈이 없는 건 두렵다. 사랑하지 않아도 애인이 없으면 두려운 것처럼.
궤도수정. 그게 버스환승처럼 간단하다면 좋으련만. : P103
연수를 비롯한 서른셋의 친구들은 제각각 삶이라는 그물에 갇혀 바둥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불안하고 흔들리며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바로 '우리'와 같은 인물들이다. 그렇게 나약하고 불확실한 존재들이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 않기 위해 저마다 일보 전진해 나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이 넘어지고 멈춰 서고 그러다 또 다시 일어나 삶이라는 레이스를 계속 해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삶을 즐기며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했던 친구 선영 조차 물질적 가치에 비중을 둔 결혼 현실로 뛰어들며 안정적인 삶의 궤도로 진입한 것 또한 백 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나도 충분히 괜찮다고,
흔들리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가끔은 멈춰서도 된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잃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조금 울었다. 이 책이 이끌어 주는 담담한 '한걸음'이 가슴 속 깊이 사무쳤다.
고마운 책이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게 분명하지만, 나는 도전하고자 하는 무엇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 P252
내가 바라는 것도 분명 이런 삶이다. '앞으로도 맨숭맨숭하게는 살지 말아야지, 정지해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야지' 다시 한 번 마음먹게 된다. 자신의 삶을 연민하고 사랑하며 응원하는 수많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가 '쿨하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오늘의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쓴 서유미 작가를 인터뷰 하며 '그래,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는 어떤 시 구절을 떠올렸다는 다른 소설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흔들리기에, 서럽기에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