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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15. 2023

네 대명사는 뭐니?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3, 차이코프스키 Symphony no.6

 뒤늦은 방문이었는지 영화관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3>는 기대한 것만큼 재미있었다. 영화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가 해체하고, 멘티스와 퀼이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는 등, 시리즈의 피날레라 할 수 있었다. 시리즈가 발전하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윤리도 진화하였다. 가. 오. 갤. 3에서는 이제 인간만이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반복적인 신체개조를 통해 탄생했기에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며 살아왔던 로켓의 서사를 통해 인간이 진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입맛대로 희생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생명 윤리에 대하여 깊이 있게 파고들면서도 재미까지 잃지 않은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멤버들의 단체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우자 다섯 명 중 누군가 박수를 쳤고, 나도 따라 쳤다. 우리 다섯은 마지막 쿠키영상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난 박수를 보냈다.

 

 가끔 그렇게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다.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6번 공연에서 나도 모르게 3악장이 끝난 후 박수를 쳤다. 드러머가 큰 북을 머리카락이 흔들릴 만큼 강렬하게 내리치고, 바이올리니스트, 비올리스트, 첼리스트의 활의 움직임이 정확히 일치하여 오르내리는 3악장의 끝에서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차이코프스키는 이 완벽한 심포니의 초연 후 9일 만에 사망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망원인은 ‘콜레라’지만, 그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명예 자살을 당했다’는 의견 역시 지배적이다. 그는 법률학교를 졸업했는데, 공직에 포진해 있던 동창들이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로 그에게 자살을 종용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 당시 작곡 중이던 심포니 6번을 완성 후 자살하겠다고 약조, 콜레라 증상과 비슷해 보이도록 비소를 먹었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스스로 <비창>이라 이름 붙인 이 곡이 그의 마지막을 정확히 예측하고 재현한 듯 아름답고 웅장하면서도 비극적이기에 그의 자살설에 충분한 스토리와 신빙성을 불어넣는 듯하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오늘날이었다면 그가 자살당했다는 주장은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동성애자’가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되어가는 시대다.


 아마추어 디자이너들이 매 회 미션에 맞춰 옷을 제작하여 런웨이에 모델을 세워 경합을 펼치는 <Project Runway>라는 유명 해외 쇼가 있다. 거의 20년 전 중학생 시절에 처음 보았던 이 프로는 20 시즌을 맞이하였다. 이 시리즈도 시대가 변하며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윤리가 많이 달라졌다. 시즌 초반에는 팔다리가 젓가락처럼 마른 모델들만 등장했는데, 이제 런웨이에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 휠체어를 탄 모델, 팔이 없는 모델 그리고 ‘성별이 없는’ 모델들이 오른다. 최근 본 에피소드에서는 디자이너가 처음 만난 자신의 젠더리스(genderless) 모델에게 “What’s your pronoun?”이라고 묻더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네 대명사는 뭐니?’ 정도가 될 테다. ‘너’를 he/she/they 중 무엇으로 부르는 게 적절할지 상대방에게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선택한 네 정체성은 무엇이니?”라는 질문이다.


 로켓은 마침내 과거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정체성으로 라쿤을 받아들여 ‘선택’한다. 영화에는 로켓처럼 인간인지 동물인지 혹은 괴물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돼지의 코, 멧돼지의 어금니, 토끼의 귀 등 동물적 특징을 지녔지만 인간의 눈을 가지고, 옷을 입고, 7등신의 신체 비율로 이족보행을 하며, 언어를 사용하는 캐릭터들. 이와 더불어 무한한 갤럭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 보라․초록․골드․파란 피부의 사람들, 당근 얼굴을 가진 인간, 말하는 나무, 마음을 가진 로봇 등을 보고 있으니, 인간/동물, 고등생물/하등생물, 여성/남성의 구분은 모두 전적으로 인간의 편협한 시각으로 만들어진 경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 짓기’에 익숙한 사고와 문화에 노출되어 살아온 나이기에 아직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어쩌면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생물학적 다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가죽 바깥의 모습만으로 인간을 단 두 가지로 카테고리화하는 오늘날의 기준은 먼 훗날에는 마치 피부색으로 우열을 가르려 했던 인종차별주의자의 가치관과 동일시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는 겉모습을 통해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경계선을 긋는 기준들이 무너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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