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Jun 17. 2023

너는 누구야?

영화 <큐어>

 오랜만에 목적이 확실한 주장의 글을 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큐어(Cure)>의 ‘영업’ 글이다. 1997년 일본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2022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들어왔는데, 마치 어제 찍은 영화처럼 스토리와 메시지가 ‘현재적’이다. 1995년 일본에서는 진도 7.2의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에 철저히 대비해 오던 일본에서 조차 6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실종자와 부상자를 합치면 5만 명에 육박했다. 대지진이 발생하고 몇 달 후에는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가스 사건이 발생했다. 옴진리교의 화학 테러사건으로 사망자 14명, 부상자는 6천 명을 넘어섰다. 1990년대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며 세계 제 2강대국이던 일본의 경제 침체가 심화되던 시기다. 일본인들은 ‘세기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 팽배했던 혐오와 불신, 불안의 감정이 지금 우리나라에도 터질 듯 팽팽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일본어로 진행되는 “한국”의 이야기 같다.


 이 정도로는 아직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그렇다면 보다 전문적인 레퍼런스를 활용해 본다. 이 영화는 일본 내 영화제에서 5번 이상 수상했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만든 감독 아리 애스터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위대한 영화 -Cure is the greatest movie ever made.-”라고 언급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13개 중 하나로 <큐어>를 꼽았다. 또한 “최고의 영화” 열 편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만점을 줬다. 이제 이 영화가 궁금해졌겠지.


 목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칼로 큰 X자를 그려 시체를 훼손하는 살인사건이 연속 발생한다. 사건의 잔혹성과는 동떨어지게 범인들은 너무 쉽게 붙잡히고, 지나치게 평범하다. 형사 타카베는 그래서, 이 살인들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어지는 씬에서 그 ‘배후’인 마미야는 바닷가에 서있다. 마미야는 근처에 앉아있던 초등교사에게 다가가 ‘여기는 어디인지, 너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를 묻는다. 초등교사는 날이 어두워지자 기억을 모두 잃은 마미야를 일단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불 켜진 거실에 앉아 있던 둘, 마미야는 불이 꺼진 부엌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묻는다. “부인은 뭐 해?” 초등교사는 “제 아내는 위층에서 자고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계속해서 “네 얘기가 듣고 싶다”라고 요구하는 마미야. 초등교사가 부엌으로 다가와 불을 킨다. 마미야는 빠져나오며 불을 끈다. 어둠 속에 남겨진 초등교사. 마치 마미야와 초등교사의 위치와 상황이 전복된 것처럼 보인다. 초등교사에게 마미야는 다시 묻는다. “부인은 뭐 해?” 초등교사는 대답이 달라진다.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주부예요.” 그리고 다음날, 초등교사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다. 아내의 가슴은 큰 X자로 베어져 있었다.


 노동자는 매춘부를, 남편은 아내를, 선배 경찰은 후배 경찰을, 여자 의사는 남자 환자를 죽이고 ‘제거’를 의미하듯 큰 X자를 새긴다. 마미야가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미야가 살인을 교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에 정직하고 뚜렷하게,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의 입을 빌려서 감독은 “최면으로 개인의 윤리관 자체를 바꿀 순 없다”라고 못 박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고 믿는 이는 아무리 최면에 걸려도 살인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미야의 최면은 대화의 끝에 자기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마미야는 최면의 대상자가 문명화된 에고(Ego)와 슈퍼에고(Superego)가 억누르고 있는 이드(Id)를 만나게 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직면하기 어려운, 거부하고 싶은 ‘날 것의 자신’을 만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진정한 민낯이 살의이자 악이라는 점이 공포스럽다.


 ‘진짜 자신’과의 직면이 마미야가 제공하는 ‘치유’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큐어>라는 제목에 참으로 충실한 스토리텔링이다. 영화는 타카베의 아내 후미에가 정신과 면담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 전반에 있어서 각종 병원 씬(scene)이 많고, 타카베가 마미야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관객은 일본의 최면치료의 역사까지 함께 거슬러 올라간다. 마미야의 치료라 할 수 있는 ‘면담’의 과정 –너는 누구야?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문명화되고 교양을 배운 사회인의 시선에서는 어긋나는 측면이 있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치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단지 개개인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마시는 공기가 이미 악으로 가득해서 인간 하나하나의 실체가 악이고, 그래서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타카베는 치유되었다. 텅 빈 세탁기를 끊임없이 작동시켜 소음을 만들고, 편의점을 다녀오는 사이에 길을 잃어버리고, 저녁밥이라며 새빨간 날것의 고기 한 덩어리를 내놓는 아내 후미에는 타카베에게 짐이었다. 음식점에서 돈가스를 손도 대지 않고 돌려보내던 그는 치유된 후 스테이크를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타카베의 치유는 그가 후미에가 죽어있는 환상을 본 순간 시작되었을 것이다. 마미야를 심문하며 어쩔 수 없이 면담을 나눈 그는 갑자기 불길함에 휩싸여 집으로 달려가고 목 매어 죽어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하지만 이는 환상이었고 살아있는 아내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실망한다. 아내가 죽지 않음에 안도하기보단 실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했음을 깨달은 타카베는 그래서 ‘완전히 치료된 후’를 마미야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치유법의 ‘전도사’가 된다. 


 의도치 않게 스포를 좀 하게 되었다. 하지만 <큐어>는 모든 내용을 다 알고 봐도 빠져든다. 화면이 지나치게 환하거나, 너무나 어둡기 때문이다. 환한 장면은 모든 곳이 텅텅 비어 불안감을 조성한다. 스크린 한 가득히 하얗게 비어있고, 가운데에 병실 침대만 하나 놓여있는 식이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마저 보일 만큼 빛이 가득한 화면은 있어야 하는 게 부재해서,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해 초조해진다. 그림자처럼 어두운 장면들은 분명히 있을 어떤 존재가 보이지 않는 듯해 으스스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대상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진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상영관에는 날 포함해 3명뿐이었다. 유유자적하게 라테 한잔과 함께 영화 시작을 맞이했던 나는, 발랄한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깜빡거리는 터널의 조명과 콸콸 흘러내리는 수도관의 물소리만으로 ‘쫄아서’ 자리를 옮겼다. 다른 두 명 가까이로. 영화가 끝난 후에는 난생처음 본 그 남자들을 쫓아갈 뻔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왓챠에 <큐어>가 올라온 후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터질듯한 긴장감이 현재 한국 사회에도 가득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고 싶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작가의 이전글 Language Eg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