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그리고 천천히
결승전
이번만 이기면 편히 쉴 수 있다.
“침착하게 침착하자. 나는 침착걸 침착우먼이다.”
30초 휴식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침착걸은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분방하며 침착우먼은 침착걸의 과정을 거쳐 성숙하고 우아하게 경기를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이런 말장난 같은 주문이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유치해서 긴장도 사라지니까.
결승에는 좀 더 기술적으로 풀어나가고 싶었다.
나는 파고들기보다 외곽을 돌며 거리를 유지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잽으로 거리도 맞추고 왼손을 활용해서 여기저기 빈틈의 기회를 엿보았다. 상대가 밀어붙이고 클린치를 하는 바람에 조금 힘에 붙었지만 내가 링 위에서 할 수 있는 건 해보자며 몸을 움직였다.
바디도 노리고 여러 기술을 쓰고 싶었지만 막상 경기에 올라가면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결승이라 그런지 더 치열하고 변수도 많았다.
주먹을 더 많이 내고 상대가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그렇게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데 신발끈이 풀려 버렸다. 신발끈을 묶는 짧은 순간 호흡이 엉켰다. 다리도 살짝 떨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팔이 무겁고 시야가 좁아졌지만 그 속에서도 한 줄기 틈을 찾으려 했다
다시 리듬을 찾아야 해
링 아래의 소음이 멀어지고 내 숨소리와 심장소리만이 들렸다. 주먹이 스칠 때마다 전류가 지나가듯 손끝이 얼얼했다. 상대의 주먹을 하나둘 피하며 주먹을 꽂았다.
관중석의 함성이 조금씩 들렸다.
마지막 10초.
서로의 몸이 엉켜 들어가며 주먹이 교차했다. 심판의 손이 사이를 가르며 경기 끝남을 알렸고 나는 그대로 링 위에 주저앉을 뻔했다.
승부의 판가름 시간이 왔고 시간은 멈춘 듯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고 환호가 쏟아졌지만 귀는 먹먹했다. 내가 이겼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우승의 기쁨은 달지만 그저 숨을 몰아쉬며 멍을 때렸다.
심장은 아직도 링 위에서 뛰고 있었다.
이번만 이기면 편히 쉴 수 있다고 했지만
정작 이 순간이 오자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끝났다는 안도보다 여기까지 왔다는 믿기 힘든 감정이 나를 덮쳤다.
링 아래로 내려오자 환호와 축하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악수를 해주는 사람들,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그 속에서도 나는 묘하게 고요했다.
메달과 상장을 받은 뒤 자리에 앉았다.
메달을 목에 걸어 보았다.
손끝으로 매끈한 표면을 어루만지자 그동안의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홀로 운동을 이어가던 날들 스파링에서 맞아가며 배우던 순간들.
그리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새벽들.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메달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모두의 얼굴이 반짝였다.
그동안 버텨온 시간들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오늘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장면이었다.
화려하게 끝을 맺은 2025 마지막 여름이었다.
그리고 내 안의 오랜 싸움이 잠시 멈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