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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Kim Feb 19. 2020

10. 자리에 가면 사람이 나타난다.

   회사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 하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직급과 직책 그리고 고용 형태에 이르기까지 조직 내에는 위치가 정해진 다양한 자리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 자리의 절대적인 위치를 막론하고 하나라도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는 걸까.


   가장 드라마틱하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자리는 누가 뭐래도 당연히 직책일 것이다. 팀장, 부문장, 본부장, 사장 그 이상에 이르기까지 본인 이름 앞에 “장”이라는 글자 하나만 더 달면 사람은 이상하게 변한다. 어떤 단위의 수장이 되면 그 안에서는 본인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팀 내에서 같은 팀원일 때는 합리적인 선배인 척하던 상사가 있었다. 팀원일 때도 법인카드를 개인카드 마냥 마음대로 쓰면서 회사 내외부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벌이던 그 상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이 워낙 돈을 많이 쓰다 보니 후배 보기 민망했는지 매일같이 야근에 치여 사는 내게 야근할 때는 저녁은 꼭 사 먹고 회사에 비용 처리하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입사 후에 오랫동안 위에 있던 팀장이 본인 술자리 비용 외에는 팀 예산을 못쓰게 하고 아낀 예산으로 생색을 내다가 임원이 된 케이 스였던 만큼, 저녁 먹어가며 야근하라는 그 형식적인 말이 그 당시에는 그래도 꽤 고마웠다. 물론 내 생활 없이 야근이 일상이 된 지금은 그때부터 그 상사가 나를 당연히 야근하는 기계로 생각했던 것 같아 분노가 치밀기는 하지만 말이다.

   윗사람들한테는 간이라도 빼줄 듯이 굴면서 공은 자기 몫으로 잘못은 아랫사람에게를 신조로 삼던 상사는 결국 팀장 자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팀장이 된 상사는 처음 얼마간은 합리적인 팀장인 척 연기하더니 결국 역대급 팀장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한 달 내내 나와 같이 야근한 후배와 인당 2만원짜리 저녁을 사 먹고 영수증을 경비 처리했다고 내가 없는 사이에 다른 팀원들에게 내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면서 야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따져 물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야근까지 했던 그 날, 팀장은 언제나처럼 회사 남자 직원들 몇 명과 술을 마시고 법인카드로 수십만원을 썼다는 걸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개인 생활도 없이 몇 달 연속 야근까지 해서라도 일이 잘못되지 않게 수습하려던 내 노력은 수고했다는 격려나 별도의 보상을 받기는커녕,  팀장이 쓸 돈을 써버리는 괘씸한 행위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임원들이 본인과 가족들에게까지 회사 자금을 개인 자산처럼 쓰다 보니 팀장 선에서 쓸 예산도 모자란데 일개 직원인 내가 감히 회사 경비로 저녁을 사 먹었으니 팀장 눈에는 내가 아니꼽게 보였나 보다.  


   직급과 직책 못지않게 고용 형태의 변화도 사람을 다시 보게 만드는 주요 변수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입사한 뒤에 팀 내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 직원은 2년간의 마음 졸임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일을 잘했다거나 특출 난 성과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2년 동안 윗선의 뒤치다꺼리를 큰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처리하고 나름대로 성실한 모습을 보여왔기에 팀 내에서 신경을 써주었고, 그 직원은 자연스럽게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전환이 되자마자 변화는 시작되었다. 원하는 직급으로 전환이 되지 않았다는 불만 표출을 시작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된 그 직원은 대놓고 이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니는가 하면, 실제로 업무 상 중요한 날 돌연 반차를 내고 사라져 이직 면접을 본 사실을 직원들에게 떠들고 다녔다. 업무 상 실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었고 다른 직원들에게 비협조적이고 시비를 거는 태도는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승진을 해서 본인이 원하는 직급이 되어서도 안하무인의 태도는 계속되었다. 타사에 합격했지만 근로 조건이 본인이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회사에 남겠다며 팀장한테 어필해 본인 업무를 줄이는 영악한 행동까지 하는 등 여전히 상전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미 사내 최악의 직원이 된 그 직원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보였던 무난한 성격은 연기였다고 하는 게 믿기 쉬울 정도다.


   길지 않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이런저런 꼴을 보면서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자리에 올라도 변하지 않고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걸로 봐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에 가면 사람이 나타난다"는 게 맞는 말 같다. 한 단계라도 자리가 바뀌었을 때, 숨기던 모습을 보여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본인의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성인이든 악인이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회사 생활을 더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을 하는 동안 지금보다 자리가 조금씩 더 높아지더라도 자리에 가면 사람이 나타난다는 평가는 듣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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