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만난 사람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지인 가족을 만났을 때다.
부동산 사무소를 같이 방문하고 집 몇 곳을 둘러본 후 계약 진행을 도왔다. 시 외곽에 있는 사무소와 시내에 있는 낯선 동네를 차로 오가며 집을 둘러보고 계약 과정에 필요한 서류 작성도 같이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다행히 오전 일찍 시작한 일이라 오후 반나절은 아직 남아 있다. 이들 가족만 괜찮다면 밖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다른 일에 곧바로 착수할 수 있다.
근처 시장과 마트 위치를 알려줘도 된다. 도서관에 가서 회원 등록도 하고 아이들을 위해 곧바로 책 빌리기도 시도해볼 수 있다. 병원과 치과 등록도 가능하다. 방학이라 교문은 닫힌 상태지만, 아이들이 다닐 만한 학교도 외부에서나마 구경해볼 수 있다. 근처 공원도 소개할 수 있다. 영국에 처음 오는 이라면 대부분 꼭 거쳐야 하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생소하고 복잡하다. 그래도 내가 나서면 비교적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이런 가족을 대할 때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반나절 정도만 시간을 낼 줄 알았는데, 내가 오후 계획까지 조심스레 꺼내놓으면 대부분의 가족은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라며 놀란다. 감사해하면서도 미안해한다. 하루 종일 내 시간을 뺏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어쨌건 곧바로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부터 하자고 나온다.
그런데 이번 가족은 부동산 사무소와 집을 오가며 시내를 돌아다니다 식당이 여럿 나와도 그냥 무시하더니, 숙소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밖에서 식사를 하고 나머지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식당에서 밥 먹지요.'라고 할 수는 없다. 묵묵히 이들 가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이들도 내가 얼마큼 시간을 쏟을지, 또 도와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다.
어린아이가 끼어 있으니 식당보다 집에서 먹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집밥을 대접하는 것이 오히려 손님 입장에서 더 감동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이 가족이 점심식사로 내놓은 음식은 라면이다. 짐 정리는 물론 장 볼 여유도 없었으니 식사를 제대로 준비하기 힘들어서 그랬으리라, 짐작했다. 이날 오후 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계획했던 하루치 일정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규모다. 어쨌건 다른 일처리도 남았기에 또 약속을 잡았다.
며칠 뒤 이 가족을 만나 남은 일정을 수행하던 중 점심시간이 다가 오자 이번에도 집으로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지금껏 모든 이동 수단은 내 차로 해결했다.
그런데 또 라면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 아들까지 데려갔더니 입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이 집 엄마가 라면에다 스파게티 면을 추가하고 있다. 양을 불려서 라면을 아끼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문에도 라면이라니 그것도 스파게티 면까지 추가해 먹어야 한다니, 휴가까지 내고 도와주러 온 나로서는 자존심 상한다.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그래도 자존심이 덜 상했을 것이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부엌에 서서 이 집 엄마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기분이 점점 더 언짢아진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마다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비싼 그릇에다 집밥을 담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라면을 주는 마당에 그릇 자랑이 곱게 들릴 리 없다. 짐 정리가 안 된 어수선한 집 상태를 보고는 이들을 없이 산다고 내가 무시할까 두려웠나? 이런 식의 돈 자랑으로 상황을 만회하려 한 건지는 모르겠다.
가정마다 사정이 있을 수 있다. 타인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는 경우다. 빚에 시달리거나 노부모를 부양하는 부담 때문에 긴축 재정으로 사는 가정도 있고, 검소한 생활 태도가 몸에 베인 가정도 있다. 그래서 부유해 보이는 형편에도 손님상을 소박하게 내놓기도 하고, 쪼들리는 형편에도 대접을 후하게 해서 손님 입장에서 부담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점점 더 이해가 안 된다.
이날 식사를 마치고 즉석에서 바이올린 공연이 이어졌다. 이 집의 장녀가 연주자다. 물론 사춘기 딸이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고 돈 자랑에 이어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다. 이왕 하는 거 길게 연주하면 좋으련만, 몇 소절 해버리고는 짜증을 내더니 가버린다. '바이올린 연주를 바로 옆에서 감상하는 거 처음이에요.'라며 부추긴 내가 괜히 미안해진다.
바이올린과 그 악보가 담긴 태블릿, 고급 식기, 살림살이까지 이 정도면 여유 있는 집 아닌가? 학비 부담에 시달리는 유학생도 아니고 교수 가족이다. 이들이 영국에 오기 몇 개월 전부터 그리고 요 며칠 직접 따라다니며 도움을 준 사람에게 굳이 집으로 오자고 해서 매번 라면만 준 마당에 돈 자랑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자존심은 상하지만 도와주겠다고 이왕 왔으니 오후에는 이 가족을 데리고 마트에 가볼까, 공원을 소개할까, 고민 중인데, 이들은 우리 모자가 빨리 떠나 줬으면 하는 눈치다. 한인 단체를 통해 알게 된 사람과 같이 자동차도 사고 필요한 물건도 받아오기로 했단다.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기대에 벌써 들떠 있다.
나는 영국에서의 정착을 서두르지 않고 진행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일처리가 느린 건 아니다.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가족을 숱하게 보았던 경험에서 나온 태도다. 하지만 영국 문화를 낯설어하면서 마음만 다급해진 분들은 나의 태도에 못마땅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번 가족은 내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싶어 새로운 인물을 물색한 건지 모르겠다.
다행이다. 마음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훗날 영국에서의 계획이 잘 풀렸으면 했다. 나는 이날 이후 이 가족을 돕는 일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뗐기 때문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athieu Stern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