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할머니가 나를 째려보며 이렇게 투덜거리셨다. 화장실 입구에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원망을 들어야 했다.
내 키는 176cm다.
남자가 아니고 여자다.
남자들 사이에 끼면 남자겠거니 하고
여자들 사이에 끼어도 남자로 오해받을 때가 있다.
나와 같이 다니는 여자는 ‘고목나무의 매미’라는 놀림이 자동으로 따라붙었다. 그런 놀림 속에서도 나와 어울려야 했던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오래전 사진을 보니 아들에게도 미안해졌다.
보통 키의 엄마라면 열한 살의 아들이 이렇게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볼 필요가 없지 않겠나.
어린 시절 아들과 사진을 찍으면 내 키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여느 집이라면 '벌써 엄마보다 크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키가 커져도 아들은 여전히 엄마보다 작았다. 그래서 '엄마 닮아 많이 크겠네' 소리만 몇 년간 들어야 했다.
웬만한 성인 여성만큼 키가 컸지만 여전히 엄마보다 작은 아이다.
아들이 고등학생 나이가 되고부터 내 키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주로 부모님과 친척들이 내게 하던 말이고, 친구나 선생님, 사회에서 만난 사람까지 한 마디씩 거들곤 했다.
- 친구와 말다툼할 때
- 서투르게 행동할 때
- (놀이기구 등에서) 겁을 많이 낼 때
- 운동을 못할 때
키와 상관없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에도 내게는 잔소리가 더해졌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왜 어린아이에게 부담을 씌우는지 모르겠다.
"삼촌, 내 키가 잘 크도록 영양제라도 챙겨 주셨나요?"
"엄마, 농구 선수로 키울 만큼 키 큰 딸 낳게 해달라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라도 올리셨나요?"
다들 예상하겠지만 키가 크면 장단점이 골고루 있다. 좋고 안 좋고의 기준은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생기면서 차차 달라졌고 지금은 대부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 얼굴이나 이름은 기억 못 해도, ‘키 큰 여자'하면 누군지 다 안다. 이건 영국에서도 통한다. 아시아계는 대체로 작다는 인상을 가지는 서양인들 사이에 키 큰 동양 여자는 한국에서보다 더 눈에 띈다. 첫 만남을 앞두고 서로의 존재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외모를 설명하는 상황에도 나는 '키 큰 여자' 한 마디면 충분하다.
좁은 화장실 입구로 들어서다 맞은편에서 나오는 사람과 맞닥뜨리면 대부분 화들짝 놀란다. 단순히 나를 남자라 여겨서만은 아니다.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지만, 타인의 해명을 들어보니 이렇다. 사람의 얼굴이 있어야 할 위치에 목이나 어깨만 보이는 사람과 좁은 공간에서 마주치니 지레 놀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럴 때 대부분의 여성은 내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는 웃으며 지나가지만,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아이고, 남잔 줄 알았네'하며 내게 원망의 눈길을 던지고 간다. '제가 뭔 잘못이라도 했는지요?'
밤길에 여성의 뒤를 따르는 것도 부담스럽다. 내 앞의 여성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두려움을 안고 걸을 수밖에 없다. 군인처럼 행군하듯 걷는 걸음에다 길게 뻗은 그림자까지 나를 남자로 오해하기 딱 좋다. 간혹, 용기 내어 뒤를 돌아보는 여성은 그나마 다행이다. 내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 내 빠른 걸음걸이만 믿고 앞의 여성을 무턱대고 추월했다가는 상대방은 엄청난 공포에 떠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뒤에서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척하며 내 목소리를 슬쩍 들려준다. '나 여자니까 무서워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후 앞질러 가기 위해서다.
치수가 하나밖에 없는 장갑이나 스타킹이 대표적이다. 평균 여성 신체에 맞추어 제작한 제품을 그 평균보다 최소 15cm나 더 큰 사람이 착용하니 맞을 리 없다. 여성용 장갑은 특히 손가락 부위가 짧고 손목까지 감싸지 못하며, 계속 쓰다 보면 손가락 끝부분에 구멍이 나기 일쑤다. 그래서 아예 벙어리장갑이나 남성용 장갑을 고른다. 추운 겨울밤, 몸을 뒤척이다가 발목이 시려 잠이 깨기도 한다. 이불이 짧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결에 이불을 가로 세로 90도씩 돌린다. 어떻게 하면 더 긴 쪽으로 돌려서 발까지 여유 있게 덮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남편과 한 침대를 쓰니 이불 쟁탈전이 벌어질 때도 있다. 치수가 크게 나오는 옷이라 해도 바짓단과 치맛단, 소매가 내게는 짧다.
여고 3학년 때 반장을 맡았다. 창에 걸린 커튼을 떼어내 빨아야 하는데, 반에서 제일 크다는 이유와 몸으로 때우는 반장이라는 이유로 매번 내가 창틀에 올라섰다. 176cm의 장신이 아니라도 떼어낼 수 있는 높이다. 그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여긴 급우들이 옆 반에 소문을 냈는지 아니면 그 반 담임이 직접 보신 걸까? 다음 날 '1반 반장을 불러서 우리 반 커튼도 떼게 해 달라'는 요청이 떨어졌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으면 학생/처자/저기요/아가씨/아줌마/Miss/Please/Hello Dear/Excuse me 등 다양한 호칭으로 날 부르며 높은 진열대에 놓인 물품을 내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
'모델해볼 생각 있어요?'라며 길거리 캐스팅인지 뭔지 될 뻔도 하고, 에이전시의 명함을 받은 적도 있지만 다 거절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고, 내 꿈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모델이 될 만한 능력과 끼가 있어야지, 키만 크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아주머니의 부담스러운 권유로 체면상 딱 하루, 모델 에이전시까지 따라가서 앉아만 있다가 온 적도 있다.
농구든 배구든 운동을 잘하면서 키가 커야지, 키만 크다고 운동선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운동부에 나를 집어넣은 적이 있다. 내 운동 실력이 금방 드러나자, '운동을 못하는구나' 하면 될 걸, 예의 '너는 키도 큰 게 왜 그러냐?' 소리가 나온다. 정규 체육시간에도 자주 들었다.
'전공이 뭐예요?', '직업이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들은 나의 답변과 상관없이 운동선수는 왜 안 하냐고 되묻는다.
'저는 키만 크지 운동 못해요'라는 말로 주변에 누누이 강조하지만, '네가 안 하면 누가 하겠냐?'라며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 대회에 불려 나갔다. 수영, 핸드볼 등 운동부 종목은 물론 배구와 축구, 발야구까지 반대항 대회가 있을 때마다 뽑혀나갔다. 사범대학을 다녔기에 교생실습을 하던 학교의 체육대회마저도 교사 대표로 뛰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직장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키에 숙진씨가 안 뛰면 누가 뜁니까?'
키 때문에 나의 실력을 오해받다 보니 곤란하고 죄책감마저 들곤 했지만, 점차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경기 결과나 승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드는 분위기가 되면서 오히려 즐거운 오락거리가 되었다.
혹시 누군가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부담을 주지는 않는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