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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곧 사라지고 마는 것

by 정숙진

"죄송하지만, 저희는 카드가 안 되는데요. 대신 현금이나 수표는 가능합니다."


몇 해 전 한국대사관에서 서류를 발급받은 뒤 수수료를 지불할 때였다. 당연히 결제가 되겠거니 짐작하고 카드를 빼들었더니 담당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평소 소액의 현금만 가지고 다니다 보니 대사관에서 요구하는 금액에 맞추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무더위에 건물 밖으로 다시 걸어 나가 현금을 찾아올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지려는 찰나,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수표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오랜 세월 기억 저 편에 묻어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은 채 내 지갑 속에 고이 모셔둔 존재가 떠올랐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과 아들은, 우리가 가진 현금을 억지로 긁어 모아도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혹은 수표에 대한 기대는 애초부터 저버렸는지, 곧바로 현금지급기를 찾으러 나갈 자세를 보였다.


난 승리의 전사라도 된 양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남자들 앞에 종이 한 장을 펼쳐 보였다. 그 이름도 찬란한 백지 수표.


사실, 찬란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내 손에 든 건 누렇게 변색되고 모서리마저 닳아버린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지갑 속에 넣어두고는 사용처를 찾지 못해 계속 처박아두기만 하던 수표다. 같은 공간에 함께 넣어둔 지폐는 수시로 나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떠나고 얼마 뒤 다른 지폐가 나타나 자리를 채워주고 또 그러다 떠나기를 무한 반복하는 동안 말이다.


쓰지도 않는 수표를 왜 들고 다녔냐고?


요즘 내가 현금을 챙겨 다니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카드 사용이 흔해진 때 당장 쓸모는 없더라도 만일을 대비해 습관처럼 넣어두는 비상금처럼 말이다.


내가 처음 영국에 왔을 때만 해도, 현금이나 카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수표가 활발하게 거래되던 시절이다. 당시 카드는 마트와 백화점, 대규모 체인점 등 일부 상점에서만 사용 가능했기에 현금과 수표까지 챙겨 다녀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영국에서 겪을 수 있는 문화 충격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수표 사용이다.


계좌 개설과 동시에 은행에서 보내주는 수표책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몇 푼 되지도 않는 잔액을 정산해 준답시고 아리송한 숫자와 문자가 적힌 종이를 업체에서 보내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영국의 수표 문화를 모른다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실 수표에 대한 나의 혼란은 영국에 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서양 영화를 보다가 '왜 수표를 손으로 써서 주지?'라는 궁금증이 생겨서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수표는 10만 원권, 20만 원권 등의 형태로 발행되어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자기앞 수표에 해당한다. 반면, 내가 본 영화에 등장한 수표는 가계 수표다.


이렇게 멀쩡한 한국어 표현이 있다는 말은 한국에도 동일한 형태의 수표가 있다는 의미겠지만, 가계 수표는 한국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수표라 할 수 없다.


과거에 누군가 백지 수표를 받아서 화제가 된 적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계 수표에 해당한다. 결코 흔하게 주고받는 거래 수단이 아니며, 각종 간편 결제 시스템이 흔해진 요즘 세상에서는 더욱 희귀해진 존재다.


아직도 가계 수표가 통용되는 영국에서 조차 이제 구시대 산물로 취급받는 처지이긴 하다.



"영국인도 자주 쓰지 않는다는 수표에 대해 알 필요가 있나?"


엉뚱한 생각일 수 있지만, 새해의 시작과 함께 영국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영국에서 곧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부터 챙겨보고 싶어서다. 수표는 언젠가 사라질지언정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을 테니까. 가령, 7,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장면에 수표가 나올 수도 있고 박물관에 전시된 수표를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국인에게 익숙한 자기앞 수표는, 은행이 지급인이며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수표다. 명절 용돈으로 삼촌에게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로 백화점에서 옷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반면, 가계 수표는 예금주가 지급인이며 지명인에게 돈을 지급하는 형태이므로 이를 곧바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없다. 친구가 내 이름으로 보내준 수표를 들고 가서 물건을 살 수 없는 셈이다.


그럼 가계 수표는 어떻게 사용할까?


우선, 수표 작성법부터 살펴보자. 아래 영상의 1분 24초 지점부터 주요 장면이 나온다.




↑ 수표 수령자의 이름과 금액, 날짜를 입력하고 서명하면 수표가 완성된다.


그럼, 이렇게 작성된 수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평범한 방법은 자신의 은행 계좌에 입금하는 식이다. 수표가 현금화되기까지 보통 근무일 기준 3일까지 걸린다는 불편함이 따른다.


수표 발행인의 통장에 돈이 충분히 있느냐도 중요하다. 당장 돈을 보내라는 협박에 못 이겨 수표를 작성해 상대에게 건네는 단계까지는 통장 잔고와 무관하게 진행 가능하다. 하지만, 이 수표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통장에 입금시킬 무렵 수표 발행인의 통장에 돈이 부족하면 현금화되지 않는다. 이름하여 '부도 수표'가 된다.


이런 불편함과 위험 요소 때문인지 영국에서의 수표 사용은 과거에 비해 90%나 줄었다고 한다. 현재는 영국인 중 44%가 일 년에 한 번 정도 수표를 사용한다고 한다.


수표는 주로 어디에다 쓸까?



"지난달에 빌린 돈 갚아줄게."


앞서 나온 영상에서도 돈을 갚는다는 설정으로 수표 작성예를 보여줬다. 상대의 계좌번호를 몰라도 돈거래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할머니 크리스마스 용돈 감사해요."


한국에서 명절에 용돈을 주는 것처럼, 영국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가족이나 친지에게 용돈을 건네기도 한다.


한국에서라면 빳빳한 새 지폐를 미리 준비해 봉투에 담아주는 수고를 거치는데 영국에서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편하게 수표로 적어 보내는 사람도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 사이에 끼워 넣어 우편으로 발송해 주기도 있다. 수표에 적힌 수령인 외에는 쓸모가 없으므로 현금을 넣어 보내는 방식보다는 안전하다 할 수 있다.



"지난 주말에 월급을 우편으로 보냈으니까 내일쯤 도착할 겁니다."


한 달 치 급여를 우편으로 보낸다고? 위험하지 않은가?


여기서 우편으로 보낸다고 한 건 현금 다발이 아니라 수표 한 장에 불과하다. 즉, 직원의 이름이 들어간 가계 수표.


Paycheck

* 급여


급여라는 뜻의 단어가 Paycheck이 된 것도 수표 형태로 돈을 받으면서 생겨난 용어다.



"수강료가 부담된다면 4회 분납하시면 됩니다."


학원 수강료를 일시불로 내는 대신 분납할 수 있다고 한다. 수표의 날짜란에다 각 분할금 납일 기한을 입력하면 된다.


가령, 3월 1일, 6월 1일, 9월 1일, 12월 1일... 이렇게 4개의 납입 기한에 맞춰 수강료를 분할 납부한다면 4장의 수표에다 각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


미래의 날짜로 된 수표는 당장 현금화되지 않기에 수표 4장을 모두 학원에 전달한다 해도 통장에서 한꺼번에 돈이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이제 수표 사용법을 익혔으니 수표가 등장하는 영화 장면을 감상해 보자.





↑ 여성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시동생에게 아이를 맡기고 가면서 수표를 건넨다. 수표 서명란에 서명만 한, 진정한 백지 수표다. 지급인의 서명이 없으면 수표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 남성이 아이의 망가진 자전거에 대한 보상으로 수표를 전달한다.


영화 제목부터 '백지 수표 (Blank Check)'다.


자신이 저지른 진짜 범죄가 탄로 날까 두려워 당장 자리를 뜨고 싶어도 사고 처리를 미룰 수 없으니 급한 김에 백지 수표를 건넨다. '나머지는 아버지가 알아서 채워주실 거야'라고 말하며.





↑ 당장 급한 불을 끄려던 남성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백지 수표를 받은 아이는 처음에는 200달러를 적으려다, 점차 욕심이 생겨 백만 달러를 적어 넣는다.


너무나 대담하지 않은가.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선물로 준 자전거를 망가뜨렸다고 탓을 하는 부모 밑에 성장하면서 아이가 돈에 대한 엉뚱한 욕심을 키운 듯하다.


백지 수표는 함부로 날리면 안 된다.


커버 이미지: mycurrencyexchan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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