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건넨 도시락엔 '봄'이 있었다.

남편의 시그니처, '도시락'

by 별빛서가

우리의 연애는 짧고도 강렬했다.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 단 1년이면 충분했으니까. 그이가 눈에 아른거려 미치도록 보고팠던 것도 아니었는데, 난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노처녀가 될까 봐 발을 동동 굴렀던 것 같다. 서른 살 봄, 난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광. 장. 시. 장에서.


가진 거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던 나. 송곳처럼 날을 세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동갑내기 옆팀 팀장은 학교 후배라며 두 살 연하의 한 남자를 소개해줬다. 서른 살 넘어 소개팅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며, 굳이 장소를 시장 한복판으로 잡았다. 그날따라 일이 많았던 소개팅남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그 사이 나는 주선자가 불러 모은 그의 친구들과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아, 술이여!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술집으로 들어온 소개팅남은, 늦은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재롱도 부리고 술도 마셔댔다. 짓궂은 형들의 장난에도 순순히 응했고,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부어라, 마셔라! 여기가 내 세상이니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 청춘이여!


"누나, 연락해도 돼요?"

그럼, 그렇지. 난 기꺼이 연락처를 건넸고, 그 후로 한두 번의 만남이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있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누나, 우리 계곡에 놀러 갈래요?"

내 인생에 '자연, 산, 강'이라고는 벗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던, 회색 도시를 오죽 이도 사랑하는 내가 '산'을 간다니. 그래도 노처녀가 되기 싫었던지, 나는 흔쾌히 "응!"이라고 대답했다.


산길은 10분만 올라도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인데, 사랑의 힘이었을까, 결혼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우리는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가방에서 수줍게 꺼낸 것은, 바로 '도시락'이었다. 다 큰 성인의 남자가, 요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겉보기에도 '음식'을 먹을 줄만 알 것 같은 외모를 가진 한 사람이 '김밥 도시락'을 야무지게 싸서 나에게 건넸다.


썸 타는 관계에서 도시락이라니.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한입 쏙 맛을 보았는데.

'아, 정말. 이렇게 자연과 잘 어울리는 맛이라니!'

식재료 본연의 맛. 마치 밭에서 막 채소를 따서 싱싱하게 썰어 넣은 것 같은, 신선한 맛! 소금과 참기름 같은 첨가물은 썸녀인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 생략했을 것만 같은, 그런 배려심이 가득한 맛이었다. 이렇게 자연친화적이고 순수한 남자라면 한 번 인생을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 후로 우리는 미처 여름이 오기 전에. 소개팅으로 만난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나와 충청도에서 일하는 그. 장거리 연애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는 참 즐거웠다. 연애 초기였던가. 아마도 그는 별 의미 없이 "난 결혼을 일찍 하고 싶어."라고 소망을 던졌을 뿐이었는데, 난 그 마음이 달아날까 봐 "난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어."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결혼식을 예약했고, 이듬해 봄 난 '정말 5월의 신부'가 되는 꿈을 이루었다.


그 후로 남편은 내 생일 때나 결혼기념일, 소풍을 갈 때마다 종종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순수한 맛이 그의 시그니처처럼 느껴졌고, 난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다.


결혼을 하고 2년쯤 지나서 우리 첫째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막 돌이 지나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쯤에는 둘째도 앙증맞게 내 배속에 둥지를 틀었다. 보기보다 내가 약한 체질이었는지, 남편의 체형을 닮아서 아이들이 배 속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란 탓인지. 임신 7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부터는 조산기에 시달렸다. 일어나거나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는 날들.



남편에게는 오로지 내가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주말이면, 혼자 아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마다 '김밥'이나 '볶음밥' 등을 싸서 나갔다. 그의 요리는 세상의 맛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에게 '도시락'은 행여 아이가 배고파서 일찍 집에 가자고 떼쓰는 일이 없도록, 나의 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그의 깊은 배려였다. 뭐든 맛있게 먹는 첫째에게도 아빠의 도시락은 '사랑'이자, '양식'이었다.


두 아이가 4살과 2살이 되었을 때, 남편은 육아휴직을 냈다. 오랜 직장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홀로 육아에 지친 나를 달래기 위한 중대한 결심이었다.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까? 그가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은 '요리학원'을 등록한 것이었다.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일주일에 두 번 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가져왔다. 와우, 난 나름대로 랍스터, 스테이크 이런 고급진 요리를 상상했는데, 매일 이름도 뭐시기 어려운 소스만 만들어왔다.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샌드위치와 파스타 정도. 학원에서도 응용법은 안 알려주는지, 소스들 또한 자연스러운 맛이었다. 아! 내추럴.


결혼생활 9년, 연애까지 우리가 보낸 시간은 10년. 그는 매일 아침이면 가족들을 위해 자연의 맛이 가득한 음식을 만든다. 행여나 두 아들들이 고기만 먹을까 봐, 채소를 몰래 숨긴 신메뉴로 입맛을 공략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남편에게,

"여보, 그... 우리 집에 소금이라는 게 있거든? 조금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 호오옥시, 모를까 봐."

"여보, 이게 참 건강한 맛이야!"라고 반찬 투정을 하면 그의 어깨가 그렇게 서운해 보일 수가 없다.


어떤 날은 남편이 나에게,

"여보, 당신은 너무 음식을 자극적으로 먹는 것 같아. 그러니까 맨날 속이 안 좋지."라고 걱정을 표현하면,

난 삐죽 입을 내밀며 라면을 끓여먹는다.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 삐딱선을 타는 나도 참, 봄스럽다.


봄바람이 살랑이고 이따금 따사로운 햇볕에 손 그늘을 만드는 시기가 되면, 그가 도시락에 한가득 '봄'을 담아 수줍게 건넸던 그날이 떠오른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때의 순수한 맛일 때도 있지만, 재료를 욕심껏 담다가 터져버린 김밥 옆구리처럼 다툼도 있었고, 정갈하게 담긴 일품 도시락처럼 다정하기도 했다. 때로는 간이 되지 않은 밍밍한 맛이었다가, 소금을 통째로 부어버린 짠맛이기도 했고.


우리는 앞으로도 '입맛'을 두고 잦은 실랑이를 할 테지만, 그것이 어떤 맛이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음에 행복할 것이다. 100세까지는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딱 60년만 더 저울질하면서 살아보자. ^^


잘 부탁합니다. 전 셰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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